Page 10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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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 인사말



                         사형 원융 스님을 그리며



                                                            원택 스님 | 발행인





             벌써 세월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나 봅니다. 소납이 출가한 세월 말입

           니다. 입문을 위해 백련암 ‘영자당影子堂’에서 7일 동안 새벽·오전·오후
           에 각 1000배씩 해야 하는 기도는 법열이 아닌 고통으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힘든 시련 끝에 소납은 1972년 1월, 음력 섣달 보
           름에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삭발하였습니다. 9월엔가 큰 절에 있던 말쑥

           한 행자가 큰스님 시자 하러 백련암으로 올라오게 되었다면서, 원주 스님
           이 소개 해주었습니다. 소납은 7월 달인가 사미계를 받고 행자 시절을 졸

           업했는데, 방금 온 행자님은 아직 사미계를 받기 전이었는데, 얼마 안 있
           어 사미계를 수지하고, 앉는 순서는 소납이 먼저 앉고 올라온 스님은 ‘원

           융’이라는 불명을 큰스님께서 주셔서 소납 다음 좌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6년이나 세수가 많았으나, 백련암에는 제가 먼저 출가했다는 이

           유로 사형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당시 절에서는 과거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굳이 자기 이력을 밝혀야 할 의무가 없어 얼굴만 알고 지냈지, 서

           로의 경력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온 원융 스님은 매사에 빈틈이 없고 모든 일에 열심이었

           으며 하루 24시간을 큰스님을 본받는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듯 했습니다.
           몇 개월 지나 ‘큰스님께서 깨치신 후 10여 년 용맹정진의 세월을 가지셨

           다’는 말씀을 원융 스님이 듣고는, 사미 신분으로 용맹정진하기 시작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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