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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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것도 저들과 같은 방에서 생활하며 저녁 9시 취침시간에 우리는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면, 원융 스님은 혼자서 좌복 위에 가부좌하며 날
밤을 새며 참선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납들은 원융 스님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멀리서 큰스님이 나타나시기라도 하면 우리들은
무슨 큰 죄나 짓고 사는 곰 새끼처럼 움츠러들었습니다.
1974년 3월에 범어사로 비구계인 구족계를 받으러 갈 때, 큰스님께서
“부처님 계율 법에는 비구계는 그 절의 출가 순이 아니라 나이 순으로 자
리가 정해지는 것이니, 원융이가 원택이 보다 6년이 위이니까, 비구계를
받으면 원융이가 사형이고 원택이는 사제가 되는 것이니 명심해라.”고 다
짐을 주셨습니다. 그러다 1975년 하안거 때 원융 스님은 큰절 선방으로
자리를 옮기고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으시다 지난 3월3일 세수 82세, 법
납 48세로 세연을 마치셨습니다. “원융 스님은 1938년 9월27일 전남 고흥
군 풍양면 율치리 사동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와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
업한 후 조달청에 근무하다, 청담 큰스님의 『신심명』의 법문을 듣고 문득
발심하여, 1972년 35세 가을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성철 스님을 은사로 모
셨다.”는 소개를 듣고서야 비로소 이력을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원융 스님은 평생을 해인총림 퇴설당을 거점삼아 12년 동안 장좌불와
의 용맹정진을 마다하지 않았고, 해인총림 선원장과 유나를 역임하였고,
2006년부터 오늘까지 해인총림 2인자격인 수좌 직책으로 후학을 제접해
오셨습니다. 오로지 평생 선수행자의 삶을 살았던 사형이 홀연히 떠나시
니, 그 섭섭함과 이런 저런 인연이야기를 짧은 글과 말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의지하였던 사형이 이렇게 홀홀히 떠나니 소납이 더욱
허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속히 수의생사 하시어 저희들을 지
도하여 주십시오!”라는 생각이 더욱 더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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