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고경 - 2017년 4월호 Vol.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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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한 서류 몇 장에 나의 경제 상태가 감출 수 없이 죄다 드 이 어려워서 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러났다. 몇 장이나 되는 서류의 빈칸에 이름을 반복해 써 넣 나는 일개인이지만 꼬박꼬박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하는 사람
으면서, 내가 누군지를 이만큼 명확하게 규정해주는 곳도 없 이 돈줄 막히면 그 고통이 얼마나 더 심할까, 괜히 친구한테
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채무자다. 걱정만 끼쳤구나 하는 자책이 들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내내 초조했던 보람도 없이 신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한 친구가 한 달 동안 빌려주겠다고 하
청한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만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 여, 덕분에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다. 상환능력을 보고 빌려준다는 것인데, 돈을 적게 번 것도 한 달이 채 못 되어 막혔던 일이 풀려서 은행에 돈을 갚으
불리하고 카드를 적게 쓴 것도 불리했다. 다른 방법이 없겠느 러 갔더니 약정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갚는 경우에는 중도상
냐고 담당직원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의 불우이웃 포스에 압 환수수료를 받는다고 하였다. 웃는 낯으로 알려주는 액수를
도당한 직원이 아무래도 불쌍했는지 어디다 전화를 해서 문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약정한 기간을 다 쓰자면
의를 하고나서는 잠시 동안 깊이 연구한 끝에, 될지 안 될지 이자가 훨씬 비싸니 울며 겨자 먹기로 내야하는 돈이다. 뒷간
모르겠지만 별건으로 하나 더 시도해 볼 만한 것이 있다고 하 에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른 탓도 있을 테지만, 급
여, 서류를 다시 써서 신청해 놓았다. 또 며칠이 지나는 동안 할 때 고맙게 썼으니 기쁘게 뜯기자고 생각하기엔 억울한 액
마음이 타들어갔다. 이럴 땐 어김없이 불안이 찾아온다. 안 수다. 그래서 애꿎은 직원에게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이
되면 어떡하나, 제2금융권으로 가봐야 하나, 그마저도 안 되 며 “중・도・상・환・수・수・료, 일곱 자나 낭비할 것 없이 그냥
면 사채를 써야 하나. 별의별 재수 없는 생각까지 꼬리에 꼬리 ‘삥’ 한 자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말해 주었다. 직원은 울상에
를 물고 일어났다. 통장과 집을 압류당하고 쩔쩔맸던 과거의 웃음을 보태며 정문일침을 가했다. “그래도 받으셨잖아요. 대
기억까지 자동으로 소환되어 근심어린 며칠을 보냈다. 출도 못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참, 그렇구나. 남의 염
불안에 떠는 동안 은행만 믿고 있을 수가 없어서 사업하는 병이 내 고뿔만 못한 법이라더니. 하여, 어떤 고통이 제일 크
초등학교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행을 제집 드나들듯 하 냐고 묻는다면, 4고 8고 중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가
니 아무래도 돈을 돌리기가 쉽지 않을까하는 기대에서였다. 장 크다고 하겠다.
반갑다고 안부 묻는 친구에게 앞뒤 자르고 콩팥 털리기 직전
이라고 SOS를 청했다. 사업차 베트남 갔다가 그날 돌아온 친
이인혜 _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
구는 알아보겠다며 다음날 연락을 주었다. 자기도 요즘 사업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 고경 2017. 04. 60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