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고경 - 2017년 4월호 Vol.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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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태어날 때의 고통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숙 엷어진다. 벚꽃 떨어질 때 날 버리고 떠난 놈 때문에 인생이
명통을 얻어 세세생생 나고 죽던 고통을 볼 수 있는 수행자가 괴롭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사람을 달
아니고서야 태어나던 순간의 기억은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달 볶지만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는 고통이다. 직장
늙는 고통은 어떤가. 젊어서는 느끼지 못하고 중년쯤 되어서 을 떠나거나 이혼을 하거나 절연을 한 뒤 상황이 바뀌면 편해
돌아볼 때에야 쇠하는 기운과 시들어가는 모습에서 늙음을 질 수도 있다.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오음이 탐욕과 집착을 부
보게 된다. 혹은 늙었다고 푸대접을 받을 때 가끔 서글퍼지기 르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인데, 맞는 말이지만 이걸로 괴로워
는 하지만 고통의 강도가 그리 세지는 않다. 서 매일같이 머리를 싸매지는 않는다. 끝으로 구부득고(求不
병고는 겪는 사람에게는 절실하겠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는 得苦)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얼마나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다 아팠다가도 회복한 다음에는 간절히 구했느냐가 고통의 크기를 결정하겠지만, 평생 간절할
언제 그랬냐 싶게 잊고 산다. 죽음은 매일같이 다가오지만 요 일이 몇 번이나 있겠나 싶어서 실은 가장 쉽게 생각했던 것인
절이 아닌 다음에야 아주 천천히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데, 이번에 구부득고를 절감한 일이 있었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한다. 주위에 먼저 간 사람을 보거나 『고경』 같은 고품격 지면에 돈 얘기를 몇 번째 쓰는지 죄송
죽음을 미리 생각할 때 두려움은 있지만 다급하지는 않다. 하기 그지없지만, 얼마 전에 목돈이 급히 필요한 일이 생겼다.
애별리고(愛別離苦)는 겪을 때는 절절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액수도 액수지만 급전이 필요한 경우는 대개 타이밍이 사람
피를 말리는 법이라,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었다.
당장 은행에 가서 대출신청을 했다. 얼마 전 가계부채가 1350
조로 불어나서 대출받기가 더 까다로워졌다는 뉴스를 들은
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은행을 찾았다가 은행 문턱에 걸
려 넘어지고 나서야 인생이 실전임을 절감했다.
친절한 대출담당 직원이 알려준 대로 서류만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은행과 주민센터와 세무서를 돌아다니며
서류를 갖다 바쳤다. 그중에는 소득을 증명하는 서류도 있었
고 카드를 사용한 내역서도 있었다. 돈 버는 능력과 돈 쓰는
능력으로 사람을 심사하고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 고경 2017. 04. 58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