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5 - 고경 - 2015년 7월호 Vol.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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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은 안 입었겠네. 이 집에 엄마 혼자 살아?” “그러는 너는,   딜 가나 주인공으로 살았을 것이다. 사람이 물건의 노예가

 거들떠도 안 보는 책들이 쌨잖아. 논어, 맹자 다 읽었다는   된 세상, 한편에서는 ‘자발적 가난’을 새로운 담론인 양 캐치
 게 엄마한테 하는 말본새가 그게 뭐니? 공부는 해서 뭐해!”   프레이즈로 들고 나오는 이즈음, 의발에 담긴 ‘오래된 미래’
 이런 말들이 오갔었다.  의 정신을 상기해볼 만하다.
 듣고 보니 찔렸다. 지적인 욕구도 아닌 단지 구매욕 때문  시작한 대청소는 마무리도 못했는데 책 몇 박스 정리했다
 에, 아니면 남들 앞에서 읽은 척 하려고 사놓고 감당이 안   고 안 쓰던 근육이 놀랐는지 자판을 두드리는 팔이 덜덜 떨

 되서 책꽂이만 차지하고 있던 책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린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이젠 몸살이 날 예정이다. 책꽂이
 따지고 보면 옷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와 책을 버리지 못하  가 좀 헐거워지긴 했으나 오늘도 생각만큼 버리지는 못했다.
 는 이유가 둘이 아니었다. 취향과 허영에서 출발하여 ‘나에  오히려 한 권 한 권 뽑아들고는 엄정한 심사를 거쳐 박스에

 게 속한 물건’이라는 아집의 연장선상에 물건들이 쌓여가고   넣으며 잘 가라고 장례를 치러 주느라 많은 시간을 잡아먹
 있었다. 죽을 때는 몸뚱이 하나 가져가지 못하고 평생의 업  었다. 하필이면 원고 마감일에 이 피곤한 작업을 시작했을
 만 따라 간다는 가르침을 여러 번 들었는데, 쓸데없이 쌓인   까 후회가 된다.
 책들이 내 업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게 다 메르스 때문이다. 어느 날 메르스에 걸려서 몰록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지 말라고, 오래 전에 비구가 지닐   죽더라도, 최소한 어질러진 방 때문에 쪽팔리지는 말아야겠

 수 있는 물건을 열여덟 가지로 제한해 주셨나 보다. 옷 세 벌  다는 생각에, 누웠던 몸을 일으켜 치우기 시작했기 때문이
 ・발우・석장・불상・보살상・경・율・부싯돌・향로・승상・좌  다. 더워지는 날씨에 우리 모두 ‘중동발 독감’에 걸리지 않기
 구・물 거르는 주머니・병・수건・양치질 도구・비누・칼・족집  를 불보살님께 빌며, 이번에 죄를 뒤집어쓴 동물원 낙타의

 게. 육체적 생존과 정신적 혜명을 위해 허락된 최소한의 물  성불도 함께 빌어 본다.
 건이다. 이것으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게 무소유에 가깝
 다. 이만큼만 쓰다가 죽고 나면 그마저 후인들이 물려 쓰고,
 남은 것은 병자의 약값이나 불사 비용에 충당했다고 한다.
 그중에 대표 격인 옷과 발우는 전법의 상징이 되어 선사

 들의 전기에 ‘누구누구에게 의발을 전해 받았다’는 표현으
          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
 로 남았다. 죽고 나서 남는 물건이 진짜 이것밖에 없다면 어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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