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고경 - 2015년 7월호 Vol.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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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에 살라고 청하여 제2세 주지가 되어 대중이 2천 명을

 넘었습니다.
 대사가 영명도량에 주석한 지 15년 동안에 제자들 1500
 여명을 제도하였고, 『종경록』 100권과 시, 게송, 부(賦), 영
 (詠) 등 천만마디를 저술하여 해외까지 그 명성이 퍼졌습니
 다. 특히 고려의 왕이 대사의 설법을 전해 듣고 사신을 보내

 제자의 예를 올리고, 금실로 짠 가사와 자수정으로 만든 염
 주와 금으로 만든 차관 등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승
                                                  새롭게 발간되는
 려 36명이 직접 수기를 받아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본국으                  『명추회요』

 로 돌아가 제각기 한 지방을 교화하였습니다. 개보(開寶) 8
 년 (975년), 12월 26일 진시에 향을 피우고 가부좌를 틀고   이 덧붙여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앉아서 입멸하시니 세수는 72세요 법랍은 42세였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영명 스님은 법안문익 (法眼文益)-천태덕소
          (天台德韶)로부터 이어져 오는 법안종 3조로서의 선사(禪師)
 무엇보다도 박인석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의 『명추회요』   의 지위와 더불어 정토종(淨土宗) 6조로서의 위상까지 얻습

 해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종경록』  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영명 선사와 가까운 100년 이내에
 의 저자인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선사의 소개입니다.  지어진 자료에서는 정토종과 관계되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

 선사는 당(唐) 말에 전당(錢塘, 항주)에서 태어나 법안종(法  니다. 선사가 입적하신지 330년 후에 지어진 원대(元代)의
 眼宗)의 3조(三祖)로서 오대(五代) 시기에 주로 활동했고 북  『여산연종보감(廬山蓮宗寶鑑)』(1305)에서 정토종 계통의 책에
 송(北宋) 초에 입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영명 선사에 대한 평  서 두드러지게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
 가와 관점은 북송시기 이후로 조금씩 변동이 있습니다. 영  명 스님에게 있어서 정토는 서쪽으로 10만 8천리 떨어져 있
 명 선사가 입적하고 얼마 뒤에 간행된 『송고승전 (宋高僧傳)』  는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유심정토(有心淨
 (988년)과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 등에서 영명 스님  土)이며, 염불 역시 마음 밖의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

 은 선사(禪師)로서의 면모가 강조되지만, 후대로 갈수록 정  라 마음의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영명 스
 토종(淨土宗) 조사로서의 면모 및 그에 따른 신비한 얘기들  님이 비록 정토를 언급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사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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