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고경 - 2015년 7월호 Vol.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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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 「표종장」과 「문답장」의 위치가 교정되어 있는 점, <가흥
박인석 교수에게 『명추회요(冥樞會要)』의 해제를 부탁하였 대장경> 본에 청의 황제였던 옹정 (擁正, 1678~1735)이 쓴 서
더니 “먼저 백련암에 가서 큰스님께서 쓰시던 장경각의 서 문이 덧붙여 있는 점 등의 차이가 있다.
책들을 보고 싶다.”고 하여 한달 전쯤 토요일 오전 10시쯤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에서 『종경록』을 인용할 때 권수
백련암에 도착하여 오후 5시쯤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갔 를 일일이 다 표시하였는데, 그 중 권1의 「표종장」 부분에
습니다. 다음은 ‘해제문’의 요약 내용입니다. 서 문구를 인용할 때는 ‘標宗章’이라는 표시를 반드시 부가
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선문정로』에 나타난 『종경록』 「표
이번에 번역된 『명추회요』와 그것의 근간이 되는 『종경 종장」의 인용을 살펴보면, 그것이 옹정황제의 서문이 있는
록』에 대한 성철 스님의 관심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선문 『종경록』 판본의 체제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
정로』에 잘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현재 해인사 백련 철 스님이 『선문정로』를 저술함에 있어 『종경록』의 촬요본
암에 소장된 5질의 『종경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아닌 『종경록』 100권 전체를 열람해서 필요한 부분을
이 5질의 『종경록』은 크게 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인용했다는 점, 그리고 『종경록』의 전체 구성에 있어서는
그 중 2질은 해인사 장경각에 소장되어 있는 현존하는 가 『종경록』 1권의 전반부를 「표종장」으로 보는 명대 이후 판
장 오래된 『종경록』의 목판본 및 그것을 저본으로 삼아 활 본의 관점을 따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화한 <대정신수대장경> 48권에 수록된 『종경록』이다. 이
중 목판본은 실물 크기 그대로 인출되어 있다. 다음으로 저는 이 대목에서 화들짝 놀랐습니다. 큰스님께서 『선문
나머지 3질은 18세기 중국에서 찍어낸 <가흥대장경 (嘉興大 정로』에서 밝히고 있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논쟁의 출발점
藏經)>에 포함된 것으로 3질 가운데 2질은 목판 인쇄본이 을 『종경록』 「표종장」으로 삼고 계신다는데 새삼 눈을 돌리
고, 1질은 그것을 붓으로 필사한 것이다. 게 되었습니다.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선교합일을 주장한 스
특히 이 <가흥대장경> 본 『종경록』은 김병용 거사가 성 님으로 규봉종밀 스님과 영명연수 선사를 들고 있습니다.
철 스님에게 기증한 도서에 들어 있던 것으로, 이 책이 조 큰스님께서는 규봉종밀 스님의 선교관을 점수로 혹평하며
선에 수입된 이후 『종경록』의 목판본뿐 아니라 필사본까 따라서 그 논리를 따르는 보조국사를 비판하고 계십니다.
지 유통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두 계통의 지금 한국불교계에서는 선학적으로나 교학적으로 영명연
판본을 비교해 보면, 『종경록』 자체의 내용은 변동이 없지 수 선사를 연구한 학자는 아직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그러
6 고경 2015.0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