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고경 - 2015년 7월호 Vol.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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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견
그러나 신기하게도 틀린 글자는 한 자도 없었고 주 표시
나 주 설명의 오자를 몇 개 발견하는 등 교정표를 만들어
『명추회요(冥樞會要)』 해제를 선연출판사로 팩스를 보내며 번역한 스님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명추회요』는 여
읽고 나서 백을 줄이는 등 편집을 새롭게 한 결과 총 784쪽의 무게있
는 책이 되었습니다.
『경덕전등록』에서의 영명 선사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봅
_ 원택 스님 니다.
선사는 여항(餘杭) 사람이니 성은 왕(王)씨였으며 젊었
을 때부터 불법에 마음을 두더니 20세가 되어서는 누린내
나는 것을 먹지 않고 하루에 한 끼만을 먹으며 『법화경』을
지난 호에서 “5월 초에 『명추회요』의 번역이 완성되었다 읽는데 일곱 줄을 동시에 읽어서 60일 만에 다 외우니 염
는 소식을 듣고서는 감개무량함 속에서 한참 멍한 기분이었 소들이 꿇어 앉아 들었다고 합니다. 28세에 화정 (華亭)의
습니다. 자그마치 23년의 세월이 걸린 일이기에 무겁게 짊어 진장(鎭將)이 되었는데 마침 영명취암(永明翠岩) 대사가 용
진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그 홀가분함에 안도의 한숨이 책사(龍冊寺)로 옮겨 오니 취암 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대중
절로 나왔습니다.”고 첫 심정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을 시봉하기에 힘쓰고 몸을 돌보지 않고 그저 들 채소와
그러고 나서 한 달이 지난 6월 12일 오후쯤에 교정별쇄 베옷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천태산 천주봉(天
본이 고심정사에 있던 저에게 도착했습니다. 반갑고 기쁜 마 柱峰)에서 90일 동안 선정을 익히는데 척알이라는 새가 선
음에 교정본을 받아들었는데 임시 편집된 교정본이라 920 사의 옷자락 속에다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합니다. 천태덕소
쪽이나 되는 부피에 주눅 들면서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했 (天台德韶, 891~972) 국사를 뵙고 수기를 받아 명주(明州)의
습니다. 첫날 저녁 밤에는 150여 쪽을 보았고, 13일 토요일 설두산에 사니 대중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정진하였습
에는 300쪽을 종일 보았고, 14일 일요일에도 늦게까지 300 니다. 건륭 원년 (930년)에 충의왕이 영은산의 새 절에 들어
쪽을 보고 월요일에 나머지 170쪽을 다 보았습니다. 와 살라하여 제1세 주지가 되었고, 이듬해에 다시 영명 대
2 고경 2015.0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