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고경 - 2015년 8월호 Vol.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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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아보니/고향마을 유계리는 물속으로 잠기었고/태어난
집터에는 벼 뿌리만 총총하네.”
이후 600여 평의 터에 3,200여 자의 ‘고향방문 기념비’
를 세웠고, 그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한 후 ‘보은원 (報恩苑)’이
라고 명명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4기의 묘를 화장한 유골
을 모시고 그 위에 보은탑을 건립한 까닭이다. 정자에는 남
양주 광릉 봉선사 주지 정수 스님의 글씨인 ‘보은원’ 현판이
걸려 있다. 수구초심 (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비문 마지막에
‘경주 이씨 37대손’임을 당신 스스로 기록했다. 이 불사를
마친 뒤 1년 후에 스님께서도 세연을 다하셨다.
육조혜능 선사는 생가에 절을 세우다
혜능(慧能, 638~713) 선사는 임종하기 1년 전에 고향 생가
에 국은사(國恩寺, 현재 광동성 신흥)를 창건한다. 여기에 머물
면서 부모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보은탑을 건립했다. 부모님
을 함께 모신 돌로 만든 묘도 현재까지 경내에 남아 있다. 하
지만 『보림전』에는 선사께서 생가를 절로 만들었다는 국은
사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스님의 전기가 실려
있을 9권과 10권이 유실되어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철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장이며,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해인사, 은해
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의 연구・번역・강의로 고전의 현대화에 일
조하면서,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서 주변과 소통하고 있다.『집
국은사 경내에 있는 육조 스님 부모님 묘 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않다』외에 몇 권의 산문집과 번역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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