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2 - 고경 - 2016년 2월호 Vol.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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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센 것은 칭찬과 비난이다. 이것들이 욕심과 화를 불러 다음날까지도 영 편치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도
일으켜 제 정신을 잃게 만들기 때문에 윤회의 계기가 된다는 서관에 갔다. 볼 것도 아닌 책을 아무거나 하나 뽑아 책상에
것이다. 또 하나의 굴곡성은 바로 불조의 언교이다. 종통과 놓고 앉아 눈을 감았다. 관세음보살이 했듯이 소리를 관찰해
설통을 갖춘 분이 현묘한 도리를 설하면 수행자는 자기도 모 보자, 하고 들려오는 소리를 일단 다 들어보기로 한다. 집중
르게 말을 따라 머리로 헤아린다. 잘못하면 계속 소리를 좇 하자마자 조용한 가운데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소
아 유전하기 때문에 듣기 수행에 가장 큰 장애가 되며, 그래 리가 있었으니, 가까운 자리에서 나는 볼펜 똑딱거리는 소리
서 종문에서는 불조의 말씀을 원수 집에 태어난 듯 여기라고 였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어떤 볼펜인지 알 것 같다. 울림통의
가르치기도 한다. 소리로 짐작컨대 네 가지 색을 한 몸에 구비한 굵은 볼펜임
물건이 내는 경직성은, 실전에 들어가면, 칭찬과 비난에 초 에 틀림없다. 마음을 후벼 파는 친구의 쓴 소리도 아니건만
연해진 수행인도 대처하기가 더 힘들다고 한다. 그 소리들을 규칙적으로 나는 경직성이 이토록 거슬릴 줄이야. 똑 딱 똑
듣지 않는 것은 아니되 쏠리거나 매 (昧)하지도 말아야 한다 딱 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면서 온 신경이
는 것인데, 수행을 안 해봐서 그런지 물소리 바람소리 따위가 그리 쏠린다. 관세음이고 뭐고, 볼펜 주인에게 살의를 느낀다.
뭐 그리 어려울까 싶다. 경직성이 더 힘들다는 말이 좀 이해될 듯도 하다.
눈을 떠보니 같은 테이블 끝자리 이용자다. 천천히 일어나
● 굴곡성과 경직성 그에게 다가가 미소 속에 살의를 감추고 볼펜을 가리켜 보였
며칠 전 오랜 친구한테서 심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다. 주의를 받자마자 급죄송 자세를 취하더니 조용해졌다. 그
이랬다. 내가 인간이 가볍고 나태하며, 불교에 대해 전혀 모르 러고 보니 주위엔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소리를 지적한
면서 교만하기 짝이 없다는 거였다. 그 친구 말이 다 맞다. 진 건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자각되었다. ‘너 병신임’하려던
실은 아픈 법이라, 뼈만 아니라 그 무게에 등짝이 다 아플 지 거였는데 역시 ‘내가 병신’으로 정리됐다. 이어서 착한 생각이
경이었다. 수긍하면서도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난걸 보면 수 하나 일어났다. 선방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여럿이, 그것
긍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좀 성숙한 인간이라면 그 친구를 도 예민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선방에서 살인이 일어나지 않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도저히 는 것만으로도 스님들을 존경하기로 했다. 그분들이 각고의
그 음운굴곡에 실린 의미를 녹여내지 못했다. 분노게이지가 수행 끝에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듣는 관세음보살이 되기를
상승하여 다시는 보지 말자고 화를 내며 헤어졌다. 머릿속에 부처님께 기도한다.
서 그에게 더 해주지 못한 말, 기역・시옷・쌍기역을 무한반복
이인혜 ●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평생 아픈 굴곡성으로 남을 것이다. 경총서>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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