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고경 - 2016년 6월호 Vol.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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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인사 총무로 내려오니 위로는 주지스님이 계시고   쳐 밀려드는 수십만 인파속에서 대소사의 상중(喪中)의 일을

 해인사 행정은 5직이 있으니 총무가 바쁘다고는 하지만 백련  정성을 다해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
 암 시자생활에 비하면 한가로운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총무  했습니다.
 를 찾아온 모든 분들이 한 목소리로 “백련암 암자에서 큰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 후 저는 비로소 세상의 풍파
 님 모시고 편안히 살다가 대중이 많은 큰 절에서 얼마나 고  를 겪게 되었습니다. 30세 즈음까지는 부모님의 덕으로, 50
 생이 되느냐?”고 위로의 말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  세 즈음까지는 큰스님 덕으로 세상풍파를 모르고 강보에 싸

 으로 “백련암에서 큰스님을 모시고 숨 한번 크게 못 쉬고 엄  인 아기처럼 세상을 살아왔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순간
 격하고 긴장의 연속 속에서 고되게 살아온 세월을 이 분들은   들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괴로운 일은
 정말 모르나 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남에게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나는 지금이 편한데 사람들은 다 큰 고생하고 있다고 염  생각하는데, 왜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생겼을까?”
 려해 주시니 다행으로 생각하자.” 하고 총무직을 수행하고 있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
 던 중, 큰스님께서 1993년 11월에 열반에 드시니 7일장 준비  는데 요즈음 와서는 “그래! 내가 남에게 잘못한 일이 있고 없
 와 영결식 및 다비식 진행 등을 떠맡게 되었고, 10여 일에 걸  고를 떠나 내가 지금 거기에 있는 존재만으로도 내 업보와 상
          관없이 무조건 싫다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

          하는 것이다. 거기서 다시 관계를 잘 유지해 가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정리했습니다.
            큰스님 추모사업을 진행하면서 2004년이 되니 환갑의 나

          이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고희를 바라
          보며 “나도 이제 잔명이 10년밖에 없는가?” 하는 허전한 마음
          이 밀려들기도 하였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서 “이제 내가 짊
          어지고 있는 짐도 언제까지 지고 갈 것인가? 사형사제들과 상
          좌들과 짐을 나누어야지.” 하고 저는 업무의 분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리스트 작성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성철 스님 다비 모습  암자 절집의 일이 무슨 조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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