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 - 고경 - 2016년 9월호 Vol.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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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기에 강서의 마조라는 명성으로 일세를 풍미하였습니
다. 마조의 선은 130여 명의 제자들에 의해서 장안을 위시하
여 전국으로 전파되어 갔으며 그 가운데 백장회해 (720~814)
는 특별히 기억해야 될 제자입니다. ‘백장청규’를 지어서 첫째
로, 율종에 속해있던 선종(禪宗)을 독립시키고 대소승의 계율
을 정리해서 선원의 제규칙을 정하였고, 둘째는 마조의 정신
을 토대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노동사
상을 확립함으로써 선종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하는 실천
적 기반을 확립한 역할이 지대하였습니다.
마조 대사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대중 접화의 길을 선택하
였고 대교단 형성의 계기를 이룬 삶을 산 데 비하여 석두 대
사는 대중을 영도하기를 거부하고 약간의 수재만을 배출했을
뿐 평생을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그 제자들도 은둔의 수행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조 스님은 “석두는 진금포(眞金鋪), 나는 잡화포
(雜貨鋪)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잡화를 구하면 나는 집어서
그에게 주고, 어떤 사람이 와서 진금(眞金)을 구하면 나는 또
그에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마조 스님이 잡화포라고 한 것은
석두 스님을 외경하는 마음으로 겸손과 자부의 뜻으로 스스
로 하신 말씀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조계의 선풍이 중당시대의 불교계에 위세를 떨쳐가고
있는 그때 당나라에는 무종(840~846 재위) 황제가 집권하
고 있었습니다. 그 회창년간(841~847)에 무종 황제가 삼무일
종(三武一宗)의 법난 중 가장 참혹한 폐불 사건인 회창법난 육조혜능이 법을 폈던 중국 남화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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