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고경 - 2016년 9월호 Vol. 41
P. 8

(845~847)이 일어났습니다. 845년 회창 5년에 마침내 전국의                                                               나 큰 단월 (檀越)들의 지

         절 4만여 개를 부수고 비구·비구니 26만 명을 환속시켰습니                                                                    원이 사라져 그 비용을
         다. 경전·승복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금·은·동·철 등의 불                                                                    충당할 수 없었다는 것
         상과 불구는 녹여서 화폐와 농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앞                                                                     입니다. 그에 비해 선종
         서 현종 황제 (712~756 재위) 때 일어난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                                                               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
         (755~763) 때에도 많은 사원과 불교전적이 산실되었는데 다시                                                                 라 하여 경전과 주석서가

         회창의 폐불에서는 교종들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크게 필요하지 않았고 산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법이 여지없이 망하                                                                     중불교로서 큰 피해 없
         게 되어버렸는데 무종이 죽고 난 뒤에 그 삼촌 되는 대중천자                                                                    이 교세가 퍼져갔습니다.

         (大中天子) 즉 선종(宣宗)이 즉위하여 불법을 다시 크게 일으                                                                     둘째는 백장청규에 의
         켰습니다.                                                                                                해서 선종사찰은 ‘하루
           선종 황제는 무종 황제가 한때 자기를 죽이려 하니까 왕자                                       중국 자은사에 모셔진 현장 법사 존상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의 몸으로 도망하여 저 깊은 산중에 숨어서 중노릇을 했습니                                                                     않는다’는 노동정신이 투
         다. 중노릇을 하다가 자기 조카인 무종이 죽게 되자 황실의                                      철하여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안사의 난과 무종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으니 대중천자(大中天子)입니다. 파괴                                     폐불로도 그 선종사찰은 경제기반이 무너지지 않고 자생할
         된 불법을 다시 복구하려고 큰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계가 워낙 큰 타격을 입었던지라 전과 같이 복구 할 수는                                        셋째는 9세기 초에 강서 및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마

         없었습니다. 교가인 천태종·법상종·화엄종·밀종·율종 등은                                       조 대사의 ‘잡화포’ 불교가 그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 널리 유
         그 전과 같은 성황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포되어 지방의 절도사들과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
         선종만은 그 전보다 훨씬 더 융창하여 갔습니다. 이렇게 교종                                     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회창폐불이 막을 내리면서 교종들
         은 그 교세를 회복하지 못한 대신에 선종이 성황한 데 대하                                      은 기사회생할 수 없었으나 선종은 훨씬 더 왕성한 발전을 하
         여 학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게 되었으니, 5가 가운데 마조 문하에서 최초로 위앙종이 세

           첫째는 폐불로 인해 학승들에게 필수적이었던 수많은 전적                                      워졌는데 백장회해의 제자인 위산영우(771~853)와 그의 제자
         이 안사의 난과 회창폐불을 당하며 불태워지고 당시 황실이                                       인 앙산혜적 (807~883)의 부자이대(父子二代)에서 위앙종이 비



         6                                                고경                   2016. 09.                                          7
   3   4   5   6   7   8   9   10   11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