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고경 - 2016년 10월호 Vol.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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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목록에 올려 읽지도 못하게 했다. 전쟁을 만나 목숨보다 소                                       달마 대사는 혜가 스님에게 『능가경』 4권을 전하는 형식을

         중하다면서 신주 받들 듯 모시던 향교의 위패들도 몽땅 버리                                      통해 전법했다. 이로써 당신 할 일을 마친 것이다. 그리고 놀
         고 도망갔다. 장수향교를 지켰던 이는 노비출신 정경손이었                                       라운 사실을 밝혔다. 이 나라에 와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
         다. 왜적이 향교로 들어서자 ‘내 목을 치고 가라’며 맞섰다. 그                                  겼다는 것이다. 6번 독살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덕분에 향교를 지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도망갔던 토                                    제 할 일을 마쳤기 때문에 7번째 독살은 피하지 않겠다고 했
         호들이 뒷짐 지고 나타나 헛기침을 하면서 그 공로에 대하여                                      다. 그는 천천히 독배를 마셨다.

         ‘장수삼절 (長水三節)’이라는 훈장을 주는 것으로 자기 일을 다                                     『보림전』 권8에서 달마 대사는 독살당한 것으로 기록했다.
         한 양 면피했다. 사상이건 체제건 나한테 유리할 때만 쓸모                                      달마독살설은 북종선의 전등역사서인 두비 (杜備)의 『전법보
         가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준 것이다. 일신의 영달과 기득                                     기 (傳法寶記)』에 처음 나오며, 6번 시도설은 『신회어록(神會語

         권 유지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신노론세력’들의 갖가지                                     錄)』에서 시작된다. 사천성을 무대로 활동하던 보당종(保唐宗)
         양태는 변주를 거듭하며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의 법맥을 밝힌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와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경덕전등록』은 이 기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 독약을 물리치기도 하고 받기도 하다                                               그 횟수를 7번이라고 한 것은 『보림전』과 『조당집』이다. 또 역

           독약사건은 『보림전』 권6에 보인다. 남인도의 왕인 천덕(天                                   경가이며 지론종(地論宗)의 시조인 보리유지(菩提流支)와 사
         德)은 주술사인 통영(通靈)의 말을 매우 신뢰했다. 그때 25조                                   분율(四分律)을 전공한 광통(光統, 468~537) 율사를 범인으로
         바사사다(婆舍斯多)가 나타나면서 왕의 마음을 빼앗았다. 질                                      지목한 것은 『역대법보기』가 최초로 기록했다. 뒷날 신청 (神
         투심에 독약으로 존자를 해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존자는 복                                      淸, ?~1361)은 『북산록(北山錄)』 권6에 “이 사실 자체가 있을

         용 후에도 몸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다만 머리 위에 3척 크                                    수 없는 일”이라며 이런 식의 기록 자체를 엄청나게 비판했다.
         기의 덮개가 새로 생겼다. 그 덮개가 무엇인지 궁금해진 영통                                     어쨌거나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당시 선종과 교종의 대립
         이 손으로 만지니 팔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다른 주술사                                      을 반영한 상징코드로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
         들이 막대기를 이용하여 덮개를 쳤으나 막대기를 허공에 휘
                                                                               원철 스님  ●          조계종 포교연구실장이며 해인사 승가대학장과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두르는 것과 진배없었다. 하지만 손으로 덮개를 휘저은 자는                                      을 역임했다.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의 연구・번역・강
         팔이 그대로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던 약기운에 닿지 않는                                      의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면서,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서
                                                                               주변과 소통하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않다』외에 몇 권의 산문집과 번역
         이들은 모두 존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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