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고경 - 2016년 10월호 Vol.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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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별어  ●  글 _ 원철 스님                   그 이유는 양반신분인 부

                                      사가 천민대접을 받는 승려
                                      계급에 예의를 표하는 것
 독약일지라도 물리칠 때와                        이 마뜩찮았기 때문일 것이
                                      다. 변소에 들어갈 때와 나

 받을 때를 알았다                            올 때 마음이 다른 것이 중
                                      생심이다. 전쟁 중에는 의병
                                      과 승군의 기세에 숨죽이고
                                      일신의 안일을 위해 공직자

                                      의 직분도 망각하고 도망을
            해인사 사명 대사 비
                                      일삼던 관료들이 이제야 그
 ● 해인사는 송(宋)씨를 미워하다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제의 잠재의식
 추석인지라 가야산을 찾았다. 사명 대사 부도  이 발동한 것이다. 어쨌거나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던 그
 탑을 참배했다. 조선사회의 온갖 모순을 한 몸에 안고서 한   부사를 수신사 자격으로 참형에 처했다.

 시대를 살다 가신 어른이다. 열반 당시 독침설은 야사(野史)에   뒷날 그 아들이 원수를 갚기 위해 한의사를 가장하여 해
 구전으로 전한다. 유몽인 (柳夢寅, 1559~1623)은 야사를 전문적  인사에 왔고 병석에 누워 있는 대사에게 독침을 놓았다고 한
 으로 수집하였다. 『어우야담』은 그 노력의 결실이다. 그는 「가  다. 전후사정을 들은 사명 대사는 인과응보를 여기에서 멈추

 야산 팔만대장경 상량문」을 남긴 문인이다. 따라서 해인사의   고자 절에서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를 몰래 도망치도록
 여러 야사도 들었을 것이고 이를 더러 기록으로 남겼을 개연  선처했다는 것이다. 물론 얼마 후 당신은 열반했다. 그 이후
 성은 충분하다. 책이름만 남아 있는 『유몽인감난록(柳夢寅勘  해인사에서 송가(宋家)는 제대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亂錄)』에 이 ‘사명당독침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집권세력 노론은 전쟁결과에 대한 사과 및 책임은커
 임진란이 끝난 뒤 왕명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도일하는 사  녕 오로지 기득권 지키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다. 전쟁영웅 영

 명 대사를 동래부사 송상윤(宋象允)은 전송하지 않았다. 물  의정 류성룡은 노론과 견해를 달리한다는 이유로 면직시켰
 론 수천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할 때도 마중하지 않았다.   다. 집권세력의 치부와 전쟁의 맨얼굴을 기록한 『징비록』은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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