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고경 - 2016년 11월호 Vol.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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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에 만나는 등(燈)은 환희롭다. 정성이 가득 담
긴 등을 통해 불자들은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되새
기곤 한다. 등은 나눔과 기쁨을 상징한다.
가을에 만나는 등은 거룩하다. 만나지 못했을 인연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하다. 봄이 아닌 가을에 등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해인사 백련암이다. 평소 같았으면 해가 밝을 때
백련암에 도착했겠지만 성철 스님 열반 23주기 추모참회법회
를 앞두고는 저녁에서야 백련암에 닿을 수 있었다. 하남에서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정심사(주지 원영 스님)에서
‘검단산 불교문화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빛을 찾기 어려운 깊은 산중이어서 현저히 느린 속도로
가야산길을 달렸다. 긴장 끝에 백련암을 장엄한 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을 보름달과 어울린 등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백련암에는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추모참회법회를 준비하기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문구가 적힌 등은 역시 백련암과 잘 위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부산 고심정사에서 온
어울렸다. 적광전과 고심원을 참배하고 경내를 둘러봤다. 성철 70여 명의 불자들은 전각 곳곳에서 절을 하고 또 기도를 했
스님 열반일을 앞둬서인지 열반송이 더 밝게 눈에 들어온다. 다. 틈만 나면 정진하는 불자들의 모습이 이제 낯설지 않다.
다만 절에 미리 도착해 실무를 챙기던 불자들의 표정이 그
生平欺狂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리 밝지는 않았다. 10월 16일 예정된 삼천배가 비로 인해 차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긴장 속에 첫날밤을 보냈다.
10월 16일은 아침부터 잔뜩 흐렸다. 오전 8시경이 되자 빗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성철 스님 사리탑에 도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착해 있던 불자들이 서둘러 백련암에 오르기 시작한다. 사람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들은 백련암 전각 곳곳에 짐을 풀기 시작했다. 삼천배는 백련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암에서 해야 했다.
20 고경 2016.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