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고경 - 2016년 11월호 Vol.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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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함께 다녀간다. 원조관음상의 기(氣)를 재충전하는 의식을 께 공부하던 도반들과 함께 스승 무비 대강백 스님을 모시고
통해 가정불의 영험을 더하고 그 가피를 입고자 하는 신앙이 참배를 온 곳이다.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롭다. 성지만이 지니
그대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는 기운이 느껴진다. 지극정성으로 삼배를 올렸다. 복건성 참
어디건 황제와 연관된 전설은 있기 마련이다. 가장 큰절인 배객들처럼 신심을 재충전했다.
보제선사(普濟禪寺)도 그랬다. 가운데 정문인 사천왕문은 굳 『선문염송』 1107칙 ‘장경무찰(長慶無刹)’ 공안의 무대가 이
게 닫혀 있다. 자리다. 고려스님이 관음상을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꿈쩍도
청나라 건륭제가 평복으로 절을 찾아왔다. 해가 기울어 이 하지 않아 배에 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절을 세
미 대문을 닫은 후였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야 문을 열 수 있 웠다. 관음보살은 아무런 차별적인 생각이 없을 터인데 왜 그
다는 고지식한 승려의 답변을 듣고는 할 수 없이 옆문으로 랬는지 주변에 있는 납자가 물었다. 그러자 장경혜릉(長慶慧
들어갔다. 기도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온 뒤에 교시를 내렸다. 稜, 854~932) 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황제도 들어가지 못한 문이니 이후에는 정문을 항상 닫아두
라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옆문을 통해 들어간 이층통법당인 “몸을 나타내는 것은 두루하지만 모습을 보는 이에게는
황금빛 거대한 원통전 (圓通殿)은 “천명이 와도 비좁다는 생각 치우침이 생기느니라. (現身雖普 覩相生偏)”
이 들지 않고 백 명이 들어가도 휑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평안한 공간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법안(法眼) 선사는 뒷날 “너희가 관음을 알
마당으로 나와 뒤편에서 닫혀 있는 정문창살을 통해 바깥 아?(識得觀音未)”라는 별어(別語)까지 남겼다. 물론 초기선종
사람들의 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닫혀 있는 것은 절대 역사서인 『보림전』을 이미 출판한 이후의 일인지라 이 기록
로 문이 될 수 없다. 설사 모양은 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을 올릴 수는 없었다.
그대로 벽이 된다. 문과 벽이 둘이 아니라는 ‘문벽불이 (門壁不
二)’의 도리를 가르쳐주기 위한 황제의 배려였다고나 할까. 뭐
든지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다.
원철 스님 ● 조계종 포교연구실장이며 해인사 승가대학장과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을 역임했다.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의 연구・번역・강
● 불긍거관음원을 찾다 의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면서,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서
주변과 소통하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않다』외에 몇 권의 산문집과 번역
불긍거(不肯去, 부컨취) 관음원은 20여 년 전 은해사에서 함 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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