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고경 - 2017년 1월호 Vol.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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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에서도 서역과 이민족 출신의 역할과 기여가 매우 컸 의 나이로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여러 해 동안 불교 경론들
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다른 어떤 분 을 두루 공부했다. 그러던 차에 운화사(雲華寺)에서 화엄종의
야보다 인도와 서역사람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중국에 처음 2조 지엄 스님이 『화엄경』을 강설하는 것을 듣고 그의 문하
불교를 전하고 『42장경』을 번역한 가섭마 등을 비롯해 대부분 로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지엄의 문하에는 신라 출신의 의상
의 역경승들은 서역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을 비롯해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지만 법장은 그곳
현장의 번역에 대비하여 구역 (舊譯)으로 불리는 방대한 대 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서역의 언어에 능통하고, 불교
승경전들을 번역한 것도 쿠차 출신의 전법승 구마라집이었다. 가 번성했던 지역 출신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었을
구마라집이 소개한 대승경전은 중국대승불교의 사상적 토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 되었다. 선종 성립의 근거가 되는 4권 『능가경』을 번역하여 흥미로운 것은 지엄의 문하로 들어갔지만 오랫동안 출가하
북종선에서 선종의 초조로 불렸던 구나발타라 삼장이나 남종 지 않고 유발제자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육조혜능 역시
선에서 초조로 추앙받는 보리달마 역시 천축국 사람들이다. 홍인에게 법을 받고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인종
중국 화엄종의 집대성자인 현수법장 역시 서역출신이다. 법 법사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한다. 이런 사례는 한국에서도 찾
장의 선조는 강거국(康居國)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부 아볼 수 있다. 성철 스님이나 광덕 스님 등도 재가자의 신분으
가 당시 국제적 문물의 중심이었던 장안(長安)으로 들어와 정 로 사찰에서 공부한 바 있다. 성철 스님은 재가자의 신분으로
착하면서 출신지를 따라 ‘강(康)’씨 성을 얻게 되었다. 법장의 해인사 선방에서 수행했고, 광덕 스님도 범어사에서 10년 동
조국인 강거국은 서역 지방에서 번성했던 국가로 지금의 사마 안 ‘고 처사’로 살았다.
르칸트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다. 안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 화엄학을 대성시킨 법장도 그랬다. 법장은 지엄 문하에서
의 국운을 기울게 했던 안록산도 강거국 출신의 부친을 두고 10년 넘게 화엄학을 공부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
있다. 강거국의 문화는 중국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이 만 출가하지는 않았다. 재가자의 신분으로 있었지만 화엄에
들의 문화는 서쪽으로도 전파되어 멀리 인더스강이나 갠지스 대한 탁월한 안목과 식견은 낭중지추(囊中之錐)와 같아서 법
강 유역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다. 장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그런 재능을 아까워했던 스승 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법장은 불교가 번성했던 중심지에서 엄은 자신이 입적하면 법장을 출가시키라는 유언을 남긴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장안에 정착한 법장이 불교 법장의 명성과 특출함을 나타내는 내용 중에는 측천무후
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법장은 17세 와 관련된 대목도 등장한다. 무후는 출가금지령을 내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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