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고경 - 2017년 1월호 Vol.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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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법장의 출가만은 허락했다는 것이다. 670년에 무후는   남겼다. 법장의 저서로는 화엄교학의 체계를 확립한 『화엄오

 낙양에 태원사(太原寺)라는 사찰을 창건하고, 칙명을 내려 법  교장』, 화엄경의 주석서인 『화엄경탐현기』가 대표적 저술로
 장을 출가시켜 그곳에서 화엄학을 연구하게 했다고 한다. 이  손꼽힌다. 이밖에도 『대승기신론의기』, 『입능가심현의』, 『화엄
 렇게 하여 법장은 화엄을 공부한 지 10년이 지난 28세의 나  지귀』, 『유심법계기』, 『화엄경전기』 등 다수의 주옥같은 논서
 이로 국가적 지원을 업고 출가하게 된다. 출가는 지극히 개인  들을 남겼다. 특히 『대승기신론의기』는 원효, 혜원의 주석과
 적 결단이지만 천재에게는 국가적 소명이 더해진 셈이다.  함께 3대 기신론소로 평가 받고 있다.

 법장은 비구계도 받지 않은 사미의 신분으로 법상에 올라   이상과 같은 법장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무후는 ‘현수(賢
 법문을 했다고 하는데 그가 법문을 하면 입에서 찬란한 광명  首)’라는 호를 내렸고, 중종도 ‘국일법사(國一法師)’라는 호를
 이 쏟아져 나와 하늘 높이 치솟았다고 한다. 입에서 광명이   내렸다. 그로부터 방대한 교학이 집대성 되었으니 당대에 천

 솟구쳐 올랐다는 것은 그의 장광설 (長廣舌)에 대한 은유적 수  재들이 많고 많았지만 ‘나라에서 제일가는 법사’라고 불리기
 사로 볼 수 있다. 태양이 대지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면 진리  에 손색이 없었다. 이처럼 법장은 대소승의 모든 법을 집대성
 의 말씀은 중생의 마음을 밝히는 찬란한 광명이기 때문이다.   하였기에 ‘법장(法藏)’, 즉 ‘진리의 보배창고’라고 불리기에 충
 그가 세운 방대한 화엄사상을 생각한다면 그의 법문은 태양  분했다.
 에 비유되는 광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법장이 장광설을 토해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드
 높다는 소식은 무후에게도 들어갔다. 무후는 조칙을 내려 천
 하의 이름 난 스님들을 증사(證師)로 삼아 법장에게 구족계를

 받게 했다. 그리고 704년 황궁으로 초청하여 장생전에서 화엄
 법계에 관해 설법하게 했다. 이때 법장은 화엄사상을 이해시
 키기 위해 금사자(金獅子)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는데, 그 내
 용은 그의 저서 『금사자장(金獅子章)』에 남아 있다.
 법장은 695년 실차난타가 낙양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화
          서재영    _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
 엄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로 참여한 것을 비롯해 실차난타  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등을 거쳐
          현재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와 함께 『입능가경』을 번역하는 등 역경 분야에도 많은 공을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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