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고경 - 2017년 4월호 Vol.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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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종경록』은 여러 경론의 문구를 단지 그대로 소개하는 것
이 아니라, 늘 ‘마음’이라는 원리를 통해 재해석하는 전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간록』의 얘기처럼, 연수 선사
는 불교의 다양한 주제들을 모아 선종의 종지인 ‘마음’의 관
점에서 다시 한 번 풀어서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고 보는 것
이 연수 선사의 진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연
<선림고경총서> 중
수 선사가 늘 활용하였던 불교적 방법론은 바로 관심석 (觀 『임간록』 상·하
心釋)이다. 이는 중국 천태종의 창시자인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 대사에 의해 제시된 것으로, 이후 선종에서도 적극 선사가 좌선하던 곳인지를 물었더니, 그렇다고 답해주셨다.
수용한 방법이다. 본인은 천태종 스님인데, 중국의 문화혁명 때 피신해 있다가
다시 그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연수 선사를 알고 간 덕
천태지의의 관심석(觀心釋) 에 노스님 옆에서 사시 예불을 같이 올리고 공양도 같이 하
연수 선사가 태어나서 활동했던 곳은 현재의 중국 절강성 고 왔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항주(杭州) 일대이다. 이곳은 중국 천태종의 천태지의 대사가 천태 대사는 정치적으로 매우 격동기에 활동한 분이었다.
활동했던 천태산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연수 선사 자신의 고국인 진 (陳)나라가 수나라에 의해 멸망되는 상황 속
는 입적하기 1년 전에 천태산에 들어가 보살계를 내리는 법회 에서도 이 명망 높은 고승의 주위에는 늘 대중들이 북적였
를 주관할 정도로 이곳을 중시했다. 필자 역시 중국에서 공부 다. 그래서 중국을 막 통일시켰던 수나라의 입장에서는 천태
하던 시기에 항주에 내려가서 연수 선사의 자취를 두루 돌아 대사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본 뒤, 천태산으로 가서 천태종의 본찰인 국청사(國淸寺)에서 같다. 천태 대사는 생애의 마지막을 천태산의 경계인 석성 (石
이틀간 머물면서 연수 선사가 90일간 좌선했던 천주봉(天柱 城)에서 마쳤는데, 이곳에서 대사는 제자들에게 『관심론(觀心
峰)에 올라가보기도 했다. 論)』이라는 짧은 책을 구술한다.
그때는 1월이라 한겨울이었지만, 천주봉 아래 몇 채의 작은 대사가 보기에 자신들의 제자들은 매우 성실하게 공부하는
토굴이 있던 곳은 유난히 볕이 잘 들어서 아주 포근한 느낌이 이들이었지만, 여전히 불법의 핵심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었다. 토굴에 계시던 노스님에게 서툰 중국어로 그곳이 연수 못하고 있었다. 남의 돈을 아무리 많이 세어도 결국에는 한 푼
● 고경 2017. 04. 46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