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고경 - 2017년 12월호 Vol. 56
P. 61
빙 돌면서 바닥에서 아가리로 올라왔다가 다시 아가리에서 옥, 칼 지옥, 불지옥을 다 거쳤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생존이
바닥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어떤 자는 가마 중간에서, 어 다른 누군가에겐 지옥인 셈이다.
떤 자는 밑바닥에서, 어떤 자는 아가리 근처에서 몸이 푹 익 부처님께서는 「지옥품」 뒷부분에서 이렇게 경고하셨다. “태
는다. 마치 콩을 삶을 때 물이 끓어 번지는 대로 오르내리면 우고 굽는 짓을 자주 하면서 / 중생을 태우고 굽고 한다면 /
서 콩 안팎이 다 물크러지듯이, 죄인의 형상도 그와 같다. 어 굽고 태우는 지옥에 떨어져서 / 긴긴 세월 태워지고 구워지리
쩌다 구리물 바깥으로 손발이 나오기도 하고 허리나 배가 나 라.” 이런 말씀을 들을 때면 그때만 약간 찜찜하다가 곧 잊어
오기도 하고 머리나 얼굴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면 옥졸이 버린다. 번번이 식탁에 오르는 고등어에 대해서 무감각할 수
쇠 갈구리로 걸어 올려서 다른 가마 속에 던져 넣는다. 가마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와 종이 다른 생물이기 때문일 것이
지옥에서 나와서는 다시 짓누르는 지옥, 피고름 지옥, 밧줄 지 다. 범위를 좀 좁혀서 인간 사회에서 찾아본다면, 가까운 데
옥, 절구 지옥 등을 거친다. 지옥이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몇 년 되었는데, 바로 여
기가 ‘헬조선’이라는 청년들의 아우성이다. 청년 작가 손아람
읽어 보니, 죽고 싶겠다. 그러나 죽을 수도 없단다. 지구상 이 쓴 글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2년 전의 글이지만 그
에 이런 곳이 있을까. 아직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지만, 삶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에, 읽어보니 아직도
아지는 콩의 비유를 읽다가 문득 부엌이 떠올랐다. 등잔 밑 유효하다. 그는 2016년을 새해로 맞이하기 전날 밤, 경향신문
의 지옥이다. 지옥은 또 거리 음식점에도 있다. 지난밤 친구 에 ‘나라에 바란다’는 뜻으로 ‘망국(望國)선언문’이라는 기고
들과 시켜먹은 치킨. 그 중생은 얼마나 많은 지옥을 지나왔을 문을 올렸다. 글은 새해 인사로 시작한다. “어려운 한 해 보내
까. 닭 공장. A4용지 한 장 가량의 비좁은 삶터에서, 처음부터 셨습니다. 새해 인사 올립니다. 올해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 부리를 잘린 채 옴짝달싹 못 그리고 이렇게 말을 잇는다.
하고 온갖 주사와 살충제를 맞고 견뎠으니 산 채로 지옥이었 “이곳을 지옥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미래의 몫으로 더 나
을 것이다.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나서는 도끼 지옥, 칼 지 빠질 여지를 남겨두는 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 잠시 청년들
옥, 후라이드 지옥, 양념 지옥을 두루 거쳤을 것이다. 집 부엌 에게 물어주십시오. 줄줄이 늘어선 초록색 빈 병으로 어지럽
도 다르지 않다. 그동안 해 먹고 살았던 것들. 아직 물속에 담 혀진 대학가의 술집 취객에게, 외로움을 둘 공간조차 없이 비
겨 입을 벌리고 있던 조개, 목살을 바친 돼지, 온몸을 바친 고 좁은 고시원의 세입자에게, 자정의 어둠을 몇 달째 지켜온 무
등어. 그들은 탕이 되고 구이가 되고 찜이 되는 동안 얼음 지 표정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나라에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
● 고경 2017. 12. 58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