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고경 - 2018년 2월호 Vol.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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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역만 해도 굶어죽지 않는다니 그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민 A4용지 60쪽 분량의 ‘팔만대장경 번역요강’을 몇 달씩 숙지하
족고전연구소 소장의 발표가 시작되었고, 그를 통해 북한의 경 고 토론한다.
전 번역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작업은 각 문헌을 맡은 역자와 팀이 협동하는 방식으로 진
해방 이후 그들은 번역을 단순히 글을 옮기는 정도로 생각 행된다. 역자가 번역해온 초고를 평가하고 토론한 다음, 후반작
하지 않고 독립된 연구 분야로 삼았다고 한다. ‘역사성’과 ‘과 업을 맡을 직책을 정한다. 각각의 직책이 오역을 수정하고 문
학성’을 염두에 두고, 번역에 앞서 사전 편찬, 서지사항 검토, 장을 다듬고 일관성을 검토하고 오자를 교정하는 몇 단계의
해제 등 밑작업을 먼저 해놓았다. 그런 토대 위에서 이른바 ‘우 공정을 거쳐 번역을 완성한다. 그런데 초고를 만들어 온 연구
리식 고전 번역 원칙’을 세웠다. 어떤 문헌이건, 어떤 문체건 간 사보다 더 실력 있는 사람이 검토를 맡는다고 한다. 일을 통해
에 ‘주체성·합리성·실용성’이라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서 ‘원 서 후세대를 길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잘 짜진 시스템 아래서
문의 뜻을 그대로 살려 원전에 손색없이 번역한다’는 기치를 집단으로 작업하면 물건도 남고 사람도 남는다. 부처님의 승단
내걸었다. 당연히 한글쓰기를 고수하였고, 그래서인지 접근하 이 그랬고, 아라한들이 대거 참석한 결집이 그랬고, 중국의 경
기 어려운 한문 경전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 옮겨 전 번역 시대가 그러했다.
놓았다. 쉽게 읽히는 번역본을 만들어낸 비결은 이런 원칙에 그러나 당시 북한은 대장경의 4분의 1 정도만 뽑아서 번역
있었다. 한 채, 돈이 없어서 사업을 지속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번역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면, 사람을 길러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소식조차 모른다. 그리고 나도 그때 북
내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원은 북한 한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남한에서는 역경 분야가 이미
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중에 민족고전연구소 연구사로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본지
선발되려면 혹독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연구사로 선발되면 번 발행인께서 경을 읽고 번역하는 나의 업을 환기시켜주신 덕분
역을 위한 훈련과정을 다시 이수한다. 이들이 대장경 번역팀에 에, 안타까운 마음에서 옛 일을 떠올려 보았다.
합류하려면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원고지 3000매를 시험적으
로 번역해야 한다. 그 시역고가 심사를 통과해야 논문 쓸 자격 이인혜
—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 편집위
을 얻는다. 논문이 통과된 연구사들은 대장경을 번역하기 전에 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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