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4 - 고경 - 2023년 9월호 Vol.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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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시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 이토의 시각은, 물론 모든 미술사와 예술사
          가 그 기저에 내셔널리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의
          학계와 일본인이 아시아와 서양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근간이 되었다.

           이토의 「호류지 건축론」은 그가 세계건축여행을 떠나기 전에 초고(1893)

          를 포함해 3번에 걸쳐 발표되었다(1896, 1898). 「호류지 건축론」에서 그는 호
          류지 건축을 ‘일본건축의 기원’, ‘동양미술의 정수’로 평가하면서 건축 역시
          미술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해서 세간에 건축의 아름다움

          을 이해시키는 것이 집필 목적이라고 밝혔다. 즉, 그는 일본건축의 아름다

          움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호류지를 사용했다. 특히 호류지 불탑과 다른
          불탑을 비교하면서 호류지 불탑을 “형식과 변화가 풍부하고 수법이 지극
          히 웅건하다.”라고 기술해 호류지를 일본미술의 정수에 위치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츄타가 세계건축여행에서 귀국한 후에는 호류지의 엔타

          시스 양식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 그는 여행에서
          기록하고 채집한 자료들을 모아 『시나 건축 장식』(1941-45, 전5권)을 간행하
          거나 ‘건축진화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했다. 츄타가 이러한 스탠스

          를 취한 까닭은 인도나 서아시아에서 엔타시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

          보하지 못한 연유가 크다. 더해서 일본 내에서 호류지 재건론의 논쟁이 일
          면서 고건축에 대한 학문적 풍토가 실증주의로 바뀌었고, 따라서 엔타시
          스 루트가 무용지물이 된 것 역시 한몫을 했다.




            운강석굴 발견


           1901년 7월, 이토는 일본인 처음으로 중국 자금성의 실측조사를 실시했다

          (34세). 자금성 조사에 대한 결과물은 츄타의 『도청일기渡淸日記』 (1898),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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