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선림고경총서 - 05 - 참선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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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잊고 열심히 정진하던 중,하루는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지극한 도를 깨치니 천 근 짐을 내려놓은 것 같
았다.이에 50여 리 떨어진 보방사로 날듯이 달려가서 혜경스님이 주
는 공안(公案)에 송(頌)을 붙여 보이니 마침내 스님을 인가(印可)하셨
는데,그때 나이 27세였다.
그 해 운서 주굉(雲棲袾宏)스님의 제자인 아호(鵞湖)의 양암 광심(養
庵光心,投子紹琦의 五世孫이다)스님에게서 보살계를 받고,그 후 운서
스님도 참례하였다.
만력 30년(1602)28세에는 상좌인 만융 원(萬融圓),조감원(照監院),
정수좌(正首座)및 유숭경(劉崇慶)등의 간청에 의하여 신주로 갔다가
얼마 후에 박산의 능인사(能仁寺)로 옮겼다.
박산은 옛날 천태 소(天台韶)스님이 개창한 도량이지만 이미 황폐된
지 오래였으며 또 대중은 모두 육식을 하고 있었으니 명말(明末)의 혼
란한 시대상을 보여준다 하겠다.그러나 박산스님이 그곳에 살면서
아호 광심(鵞湖光心)스님의 도움으로 계율을 다시 일으키고 거사들의
협력으로 도량을 새로 세우니 선(禪)과 율(律)이 함께 시행되었다.
만력 36년(1608)무명 혜경선사가 건주(建州)동암선사(董巖禪寺)에
서 법을 펴시면서 대사를 초청하여 분좌설법(分座說法)을 하게 하셨
다.이후로 박산의 종풍(宗風)이 마침내 널리 퍼지니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승속(僧俗)이 많아서 800명의 선지식(善知識)이라 불리었다.
이후로 앙산(仰山)보림선사(寶林禪寺),고산(鼓山)용천사(湧泉寺),
금릉(金陵)천계사(天界寺)등 여러 곳에서 법을 펴 보이셨다.
한편 스님은 출가 이후로는 속가(俗家)의 집과는 연락을 일체 끊었
으나 이미 그 도가 널리 알려지자,비로소 스님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고 아버지께서 박산으로 찾아왔으니 참으로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만남이었을 것이다.스님은 효도하는 마음에서 아버지에게 육식(肉食)
을 끊도록 권하면서 1년 남짓 머무르게 하였다.얼마 후 아버지가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