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선림고경총서 - 21 - 태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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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으며,신돈이 죽임을 당한 후 다시 국사로 추앙되었다.그 후 영원
사(瑩原寺),양산사(陽山寺)등에 잠깐씩 머무르다가 82세 되는 겨울,소
설암에서 입적하셨다.
어록의 상당법문은 그 설법하신 장소를 기준으로 하여 영녕선사(永寧
禪寺),봉은선사(奉恩禪寺),궁내(宮內),중흥선사(重興禪寺),봉암선사(鳳
岩禪寺),보림선사(寶林禪寺),영원선사(瑩原禪寺)등의 일곱 군데로 나
눌 수 있으며,법문의 내용은 주로 심지(心地)법문이다.특히 공민왕을
위한 마음법문[心要]에서 보면 ‘부모가 낳아주기 전의 본래모습[父母未
生前本來面目]’을 자세히 살필 것과 어묵동정(語黙動靜)에도 화두가 끊
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자나깨나 한결같은 경지[寤寐一如]에 이르게 되면
크게 깨침에 가깝다고 하였다.
참선하는 납자들과 신도들에게 준 짧은 글 속에서도 역시 참선에 대
한 법문을 하였는데,특히 조주(趙州)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말씀하시고,
염불을 하면서도 화두를 참구하라고 하셨다.
그의 문하에는 항상 1천여 명의 운수납자들이 모여 지도를 받았으며,
그 가운데는 일본에서 온 선인[志性,中菴,石翁,雄 등],중국의 강남에
서 온 선인[無極,古潭,思 등]그리고 천축에서 온 선인[達摩悉]등 외
국의 납자들도 많이 있었다.
한편 고려말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어울려 스님은 승단의 개혁 등을
주창하였다.홍건적의 난을 예견하고 성을 쌓았으며,특히 도읍을 한양으
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내원당(內願堂)에서 행한 설법에서 당시 스님
들의 시대상을 비판하였고,왕사로 봉해진 뒤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한
뒤에는 9산선문(九山禪門)을 일문(一門)으로 개편하려고 노력하였다.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