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선림고경총서 - 22 - 나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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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하였다.여기에서는 선과 교를 총말아하여 시험을 보았으나 오직 환
            암혼수(幻庵混修)만이 스님의 인정을 받았다.이때 당시의 국사이며 화
            엄종의 대종사인 설산(雪山:千熙)스님을 방석으로 때린 사건이 이 어록
            에 실려있다.이듬해 8월 왕사(王師)로 봉숭되어 금란가사와 법복 및 바

            루를 하사받았다.그 후 4년간은 병란에 불타버린 회암사 중창에 전력하
            였다.
               그동안에 공민왕이 돌아가시고 우왕이 즉위하여 다시 왕사로 추대되
            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중앙 대간(臺諫)들의 압력으로 밀양 영
            원사(瑩源寺)로 그 처소를 옮겨가던중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시니
            (1376년 5월 15일)세수는 57세이고 법랍은 38세이다.
               스님은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열반불사(涅槃佛事)’라고 하였는데,스
            님의 열반 후 10여 년 이내에 신륵사 이외에도 금강산,치악산,소백산,
            사불산,용문산,구룡산,묘향산 등7개 소에 이색(李穡)이 찬한 탑비가 세
            워졌고,또 원주 영전사(令傳寺)에도 탑비가 세워졌다.
               스님의 어록은 ‘어록(語錄)’과 ‘가송(歌頌)’두 권으로 되어 있다.시자

            각련(覺璉)이 수집한 어록에는 상당법어 29칙,짧은 글 25칙,이색이 찬
            한탑명과 문인 각굉(覺宏)이 쓴 행장이 실려 있다.
               이 상당법문의 형식상 특색은 첫재 특별한 구분의 기준 없이 스님이
            중국 광제선사에서 개당한 때의 법문을 시작으로 하여 스님의 행장과 거
            의 비슷한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그러나 모든 법문에 대해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상당법문에는 공민왕과 그 왕비인 승의공주에 대한 수륙재(水陸
            齋)에서 행한 법문을 비롯하여 영가를 위한 법문이 특히 많다.그리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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