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고경 - 2015년 3월호 Vol. 23
P. 28
이 글에서도 보듯이 선 그러나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
과 악, 주인과 손님의 양 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 대사는 태조와 함께 일선에서 물러
변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나야 했고, 몇 년 뒤 입적하게 됩니다. 무학 대사의 전법제자
것이 부처와 조사의 길이 로는 함허 스님이 유명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 함허 (涵虛, 1376~1433)는 『금강경오가해설의』로 유명합니
르침을 받은 무학 대사는 다. 충주에서 태어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한계를
나옹 대사를 모시고 함 느끼고 무학 대사를 스승으로 출가했습니다. 회암사에서 정
주로 가서 이성계의 부친 진하였고, 선풍을 크게 떨쳤으며, 세종이 명성을 듣고 어찰
묘지를 정해줍니다. 이것 (御刹)인 대자사(大慈寺)로 모시어 법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은 마치 도선 국사가 개 강화도 정수사와 송광사, 대승사, 봉암사 등에서 교화하였으
성을 지나다 고려의 태조 며, 『금강경』을 해설한 육조 등 오가(五家)의 풀이에 자신의
무학 대사 진영
가 될 왕건의 탄생을 예 설의 (說誼)를 더하여 『금강경오가해설의』를 펴냈는데, 선의
언한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그 뒤에 무학 대사는 안변의 한 입장에서 『금강경』을 풀이한 뜻이 깊고 문장이 아름다워 강
토굴에 머물 때 이성계가 찾아와 불난 집에서 서까래 세 개 원의 교재로 채택되는 등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를 지고 나오는 꿈을 해몽해 달라 하자, 그것은 왕(王)이 될 세종에 이어 세조대에 왕의 귀의와 지원에 힘입어 불교
꿈이라며 이성계에게 혁명가의 용기를 불어넣었고 이성계는 가 일시 중흥했는데, 당시 활약한 이로 수미 (守眉)와 삼화상
대사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설봉산석왕사기』). 으로 불리는 신미 (信眉), 그의 제자들인 학조(學祖), 학열 (學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 이성계는 무학 대사를 왕 悅) 대사가 있습니다. 신미 대사는 세종의 신뢰를 받은 김수
사(王師)로 추대하였습니다. 대사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온의 친형으로 지혜와 인품이 훌륭하여 당시에 생불(生佛)로
개국을 적극 후원하였고, 태고 국사가 공민왕에게 권한 것처 불리웠다고 합니다.
럼 한양 천도를 도모하였습니다. 오늘날 왕십리 (往十里)라는
전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학 대사는 한양 천도에 역할을 서산 대사의 활약과 법맥(法脈)의 계승
하고, 양주 회암사 등을 조선의 왕실사찰로 정하여 불교와 조선 연산군 대에 이르면, 선교양종으로 통합된 교단도
조선왕조를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해체시키고 사찰도 일부만 두고 폐사시켰으며, 승려의 도성
26 고경 2015.0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