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고경 - 2015년 3월호 Vol.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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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마저 금지시켜 불교는 산중으로 밀려나 사회적인 역할 맥은 사명, 편양, 소요, 정관 등 70여 명의 뛰어난 제자들에
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 고스란히 전해져 조선 후기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그러다 명종 대에 독실한 불자인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하였습니다.
일시나마 불교 중흥의 기운이 일어났습니다. 문정왕후는 보
우 대사를 중용하여 승과(僧科)고시를 부활시켰는데 서산, 조선 후기의 간화선
사명과 같은 스님들이 이때 배출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불교는 의승군의 활약으로 조선 사회에 존
1592년 선조 대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유교국 조선의 한계 재감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에 조정은 불교 승려의 군사적인
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의 군대는 지리멸렬하여 17 활용 가치를 인정하면서 탄압의 강도가 약화되기 시작하였
일 만에 왜적에게 한양을 내어주었습니다. 선조는 서산 대 습니다.
사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서산(西山, 1520~1604) 대사는 전 조선 후기 정조 대에 이르러 불교 사찰 수는 조금씩 늘어
국 산사에 궐기문을 돌려 의승을 모집하니 그 숫자가 5천 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정조는 화성을 쌓고 사도세자를 추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서산, 사명, 영규 대사가 앞장선 의 모하는 사찰인 용주사를 창건하고는 남, 북한 산성 수비를
승군은 평양성 탈환과 행주산성, 청주성, 금산 전투 등에서 총괄하는 도총섭을 두게 하여 팔도 사찰을 관리케 하였습
크게 활약하여 의병과 함께 구국 활동에 기여하였습니다. 니다.
그런데, 이러한 임란 의승 활동에 대하여 불살생 (不殺生)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사찰 승려들은 조정과 관아
을 지켜야 할 승려들이 파계 (破戒)한 것이라는 비난이 지금 의 노역에 시달렸고, 지역 유생들의 박해가 극심해져 갔습
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견이 아닐 니다. 각 사찰은 종이와 짚신 등 지역 특산물을 만들어 관
수 없습니다. 당시 서산, 사명 대사의 전쟁 참여는 왜적의 침 아에 바치고 군역 (軍役)까지 맡아야 했습니다. 출가자의 본
략으로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을 구하면서 왜병들이 분인 수행보다는 생존을 위한 온갖 잡역과 일이 우선이었습
살상의 악업을 더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 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선풍(禪風)은 약해지고 선원 (禪
진 보살행인 것입니다. 院)은 쇠락해져 갔습니다.
서산 대사는 조선조를 대표하는 선사(禪師)입니다. 대사는 그나마 호남지역 표충사가 있던 대흥사와 선운사, 구암사
태고–환암–구곡–벽계–벽송–부용–서산으로 이어지는 등에서 강맥이 전승되어 강원이 유지되었고, 백파와 초의 선
간화 법맥의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태고에서 시작된 간화 법 사 사이에 선 논쟁이 일어나 선풍은 유지되었습니다. 백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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