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고경 - 2015년 3월호 Vol.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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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몸이라고 해서 부처님의 몸과 다르지 않음은 분명 철저히 부정해 가는 ‘쌍차(雙遮)’에 해당한다. 집착이 고통과
하다. 부처님도 중생과 똑 같은 몸으로 수행하여 거룩한 부 속박의 뿌리이므로 철저하게 부정할수록 해탈의 자유는 크
처님의 몸을 이루었다. 몸 자체의 더러움이 문제가 아니라 다.
육신의 욕망을 어떻게 조복하는가가 관건일 따름이다. 이 하지만 쌍차를 통한 부정에는 긍정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
몸이 지탱되는 것 자체는 신비로운 조화와 연기적 관계의 다. 철저한 부정의 관점, 쌍차를 통해 자신에 대한 집착을
산물이다. 따라서 『대념처경』에서 말하는 육신의 더러움과 철저히 해소했다면 이번에는 쌍조(雙照)로써 긍정하는 길로
감각의 고통은 집착을 끊고 해탈을 얻는 범위에서 닦아야 가야 한다. 깨달음을 얻어 거룩한 존재가 될 자아에 대한 절
할 것이지 부정성만을 절대화해서 자아에 대한 혐오적 가치 대적 긍정으로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 쌍조이다. 여기서 몸
관을 가지는 것이 수행의 목적은 아니다. 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넘어
육신을 더러운 것으로만 보는 것은 또 다른 변견이다. 그 서는 불구부정 (不垢不淨)의 중도적 시각으로 이해된다.
와 같은 변견의 눈으로 육신을 보면 진짜 육신의 모습인 ‘정 신수심법에 대한 관찰을 통해 육신에 대한 집착을 해소
색 (正色)’을 바로 볼 수 없다. 오로지 부정적인 측면만을 관찰 했다면 더 이상 자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육신을
하고 그것에 매몰되는 것은 중도정견이 아니라 변견이다. 정 부정하는 것은 집착을 해소하기 위함이지 육신 자체를 더럽
견으로 보면 ‘내 몸 그대로가 실상(實相)’이며, ‘중생의 몸 그 게 보거나 부정하기 위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한 부정
대로가 제불의 법신’이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견해이다. 따 을 통해 다시 대긍정의 자아로 돌아오는 것이 중도의 길이
라서 성철 스님은 부정적 시각으로만 몸을 바라보는 것은 다. 긍정으로 돌아와 참된 자아를 깨닫고 법신의 몸으로 이
제불의 법신과 동등한 중생의 몸을 생멸의 몸으로 잘못 이 해하는 것이 중도의 눈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사념처를
해하는 망견이자 착각이라고 했다. 통해 자아에 대한 부정과 염세적 가치관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긍정의 메시를 읽어낸다.
중생의 색신이 곧 법신 여기 엄청난 값이 나가는 황금 덩어리가 하나 있다고 하
성철 스님은 육신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성문이나 연 자. 만약 황금을 알아보는 눈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누런 인
각의 관점이라고 보았다. 그와 같은 관점은 중도정견이 아니 분 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황금을 똥덩이로 착각할지
라 색안경을 끼고 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이다. 사념처 라도 황금의 가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도
관법을 통해 육신의 부정을 깨닫고 집착을 해소하는 것은 의 눈으로 보면 중생의 몸이라고 해서 더러운 오물로 가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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