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고경 - 2015년 5월호 Vol.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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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다시 보기
작용이 생겨난 것이다. 예를 들어 붉은 장미를 좋아하는 사
람은 자기 마음이 본래 붉은 장미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
번뇌는 내 안에 있는가? 지만 ‘붉은 장미를 좋아해!’라는 인식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붉은 장미라는 대상을 만나서 생긴 ‘눈의 인식 [眼識]’이다. 만
약 눈이 없다면 ‘붉은 장미가 좋다’는 마음도 있을 수 없다.
_ 서재영
마찬가지로 설사 눈이 있어도 눈의 대상이 되는 ‘객관의 사
물[境界]’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욕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사람은 오늘날 사람들이 욕망하는 샤넬이나 루이
뷔통 같은 명품을 욕망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 때 사람들도
눈이 있고, 사치품에 대한 욕망은 존재했지만 오늘날 사람들
번뇌는 내 속에 있는가? 이 욕망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우리는 종종 “내 속에 욕망이 가득해!”라는 말을 하곤 한 는 루이뷔통 백을 좋아해!”라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그 브랜
다. 무심코 던지는 말이지만 이 말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번 드에 대한 선호도가 본래부터 내재해서가 아니다. 눈이라는
뇌가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인식은 ‘인 감각기관이 주체적 원인 (因)이 되고, 밖으로 감각의 대상이
간은 번뇌덩어리’라거나, ‘인간의 본성은 욕망하는 존재’라 보조적 조건[緣]이 되어 만들어진 관계적 인식이 마음이다.
는 식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과연 욕망이나 번뇌는 내 속 이렇게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을
에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욕망은 언제 어떻게 생겨 모두 합치면 12가지 범주가 되는데 이를 ‘십이처 (十二處)’라
난 것이며, 언제부터 내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게 된 것일 고 부른다. 그리고 감각기관이 감각의 대상을 만날 때 우리
까? 이에 대한 답은 초기불전에 설해진 십이처설 (十二處說)에 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여섯 가지 인식이 성립되는데 이를
이미 설명되어 있다. ‘육식 (六識)’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마음은 인연 따라 생겨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의식 (意識)은 여섯 가지 감각 난 작용일 뿐 어떤 실체로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관[六根]이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六境]을 만나서 형성되는 마찬가지로 욕망과 번뇌도 본래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
것이다. 즉 눈, 귀, 코, 혀, 몸, 분별의식 [意]이라는 감각기관이 라 감각기관이 객관대상을 만나는 관계를 통해 성립된 것이
빛, 소리, 향기, 맛, 촉감, 비물질적 대상[法]을 만나서 마음의 다. 이처럼 마음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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