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고경 - 2015년 9월호 Vol.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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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은 백련암에서 장좌불와를 준비하는 원융 스님  만 장좌의 일과를 지속

 에게 운동을 겸해서 하루에 나무 한 짐씩 하는 일과를 주었  할 수 있었습니다. ‘수
 다. 그러다 원융 스님은 큰절로 내려왔다. 큰절에 왔을 때 성  좌 5계’를 완벽하게 지
 철 스님은 다시 하루 300배의 일과를 줬다.   키기란 몹시 어려웠고,
 “절하는 일과는 특히 장좌불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지켜보려고 노력하였으
 중요한 것이었어요. 밤새 앉아 있다가 새벽에 입선하고 나서   나 완벽한 적은 한 번도

 엄습해 오는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몸  없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을 풀고 회복하는 데 절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요. 아침 다섯   도 대중에게 더러 말씀
 시에 방선하고 나서 법당에 가서 300배를 하며 땀을 흘리고   하시기를 ‘5계를 완전히

 나면 지친 피로도 풀리고 몸이 새로 생성되는 것 같아서, 다  지킨 사람은 아직 아무
 시 하루의 일과를 생기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도 보지 못했다’고 하셨
 그러나 장좌불와가 그리 쉽지 않았다. 밤새 앉아 있다 보  거든요. 지금의 공부와   문도스님들과 매화산에 오른 원융 스님
 니 대중 정진시간에 남보다 더 졸 수밖에 없었고, 이것을 지  장좌할 때의 공부를 비
 켜본 한 구참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얘기를 건네, 성철 스님  교하면 더 진전했느냐 후퇴했느냐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할

 은 원융 스님에게 장좌불와를 그만 풀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대혜 스님의 말씀에서처럼, ‘선 곳은
 스승의 당부가 원융 스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10  이미 익고, 익은 곳은 이미 선다(生處已熟 熟處已生)’는 법문을
 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새로 지은 선원에서 2년여 더   가지고 스스로를 비춰보는 의미가 있겠으나, 그래도 이렇게

 장좌불와를 했다.   만 쉬어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당시 공부경계를 스스로 살펴볼 때 공부의 밀도가 소가
 밟아도 깨지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것은 얼마   “큰스님은 명실상부한 본분종사(本分宗師)”
 가지를 못했고 이내 평범한 공부자세로 돌아가게 되어 버렸  원융 스님은 성철 스님의 시자로서 그리 민첩하지 못했다
 어요. 장좌를 풀고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  고 회고했다. 그래서 더 아쉽다고 한다.

 면, 그래도 그때가 공부하는 것처럼 했던 때였습니다. 적어  “백련암과 큰절 선원에서 20여 년 간 시자(侍者)로서 큰스
 도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수좌 5계’를 비슷하게나마 지켜야  님을 모시는 동안 민첩하고 눈치 빠른 선타바(先陀婆) 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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