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고경 - 2015년 9월호 Vol.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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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하나입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신심명』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모를
때는 그것이 금과옥조이지만, 알고 보면 흙덩이보다 못한 것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두를 열심히 참구해서 자성을 확
실히 깨쳐야만 『신심명』의 바른 뜻을 알게 된다’고 하신 말
씀은 지금까지 귀에 쟁쟁합니다.”
그렇게 청담 스님의 장례를 마무리할 때 쯤 스승의 인연
이 다시 찾아 왔다. 1971년 11월, 청담 스님의 다비가 끝나
고 서울의 한 신도 집에서 잠깐 쉬고 있던 성철 스님을 친견
하게 된 것이다.
법전, 성철, 혜암, 일타 스님을 모시고 선 원융 스님
“큰스님께서는 평생의 도반을 잃으셔서 그랬던지, 다소 피
로해 보이셨어요. 얼굴은 까무잡잡해 보였지만, 또렷하면서 이나 똑같다’고 하셨어요. 사실 나이 어린 행자와 비교 당하
도 커다란 눈으로 저를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면서 혼날 때는 마음이 좀 그랬습니다. 하하.”
원각회 김경만 회장님이 저를 큰스님께 ‘공식적’으로 인사시
키는 자리에서 대뜸 ‘이 젊은이가 큰스님께 공부하러 간다 12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
고 합니다’고 말해 버렸습니다. 마음은 있었지만 ‘결심’을 하 출가를 하고 나서 스님은 ‘백련암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
지 못했던 상황에서 저의 출가가 공식화 되어 버렸습니다. 를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본어를 공부하며 경전들
하하.” 을 보기 시작했다.
원융 스님은 해를 넘겨 백련암으로 갔다. “큰스님을 찾아 “백련암에서 처음 마음에도 없는 일본어를 익혀서 큰스
뵈었더니, 반겨주시면서 서울에서 보신 걸 기억하신다고 하 님께서 주시는 책들을 다 받아 보는데는 2년쯤 걸렸습니다.
셨어요. 그래서 조금은 홀가분하게(?) 백련암 생활을 시작할 말하자면 ‘백련암 이력’인 셈인데, 전통강원의 주요 교과목
수 있었습니다. 출가할 때 제가 서른다섯이었는데, 먼저 와 들을 포함해서 『천태사교의』, 『화엄오교장』, 『법화』, 『유식』
있던 행자 중 한 명의 나이가 열여덟이었습니다. 큰스님께서 등을 마치면 『임제록』, 『벽암록』, 『정법안장』, 『정법안장수문
는 저를 혼낼 때 항상 ‘스무 살 먹은 놈이나 마흔 살 먹은 놈 기』 등을 주셨어요. 일본 조동종 개조 도원 (道元) 스님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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