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고경 - 2015년 9월호 Vol.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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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불황이 장기화되면 마음도 황량해진다. 자존심을 【제25칙】
중시하고 자신감이 강조되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개 염관의 무소 뿔 부채(鹽官犀扇, 염관서선)
인의 정서가 불안하고 위축돼 있음을 시사한다. 더불어 오
로지 뜨면 그만이고 이기면 장땡인 세태다. ‘잘난 척’과 ‘있 염관제안(鹽官齊安)이 어느 날 시자(侍者)를 불러 무소 뿔
는 척’이 곳곳에서 마시고 떠든다. 신의와 원칙을 믿지 않는 부채를 달라고 말했다. 시자가 “부채는 부서졌다.”고 답하
부모는 자녀를 인간이 아닌 전사(戰士)로 키운다. 자 “부채가 망가졌거든 무소라도 돌려달라.”고 다시 일렀
무아(無我)는 이론적으로는 옳지만 실존적으로는 헛것임 다. 무슨 소린가 싶은 시자는 말문이 막혔다. 자복여보(資
을 자주 경험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어디 가지 않는 福如寶)가 나타나 땅에 일원상(一圓相)을 그린 뒤 그 안에
다. 그리고 그래야만 근근이라도 내가 살 수 있다. 저자거리 ‘牛(우)’라고 썼다.
에서 경쟁은 운명이요 갈등은 순리다. 사회적 삶이란 결국
자아의 통제와 조절이 관건이다. 자아가 치솟으면 살인과 연 선어록에 수록된 언설들은 대부분 대화다. ‘불법 (佛法)은
을 맺고, 자아가 무너지면 자살이 그 자리를 메운다. 일상에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그렇다고
자아를 부릴 수 있으면 바로 도인이다. 현실을 흔쾌히 받 아무 대화나 가져다 바르는 것은 아니다. 선지식 (善知識)들은
아들이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만 매진하는 게 그의 패턴 말 속에 칼을 담는다. 알아보는 자들은 그 칼을 꺼내 휘두
이다. 내 몫을 지키되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견딤에 능하 른다. 염관이 요구한 ‘무소 뿔 부채’는 단순히 부채가 아니라
다. ‘나’를 인정함으로써 얻는 ‘나’로부터의 자유로움. 깨달음 불성 (佛性)을 가리킨다. “무소라도 돌려 달라.”는 건 너의 부
은 구태여 심오하달 것 없이 심심하다. 담백한 인생에 대한 처다움을 일껏 드러내 보이라는 뜻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
꿈은 아주 오랜 생각이다. 자서 가라’는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이 겹치는 대목이다.
자폐증 소년의 엄마는 아들과 함께 등교했고 종례시간이 자복의 그림은, 훈수다. 구도의 과정은 으레 심우(尋牛)로
면 다시 학교에 왔다. 아무 말이 없었고 그러므로 혼내지도 표현된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한 번 질
탓하지도 않았다. 단지 손을 꼭 잡는 선에서 애정표현을 절 러보란다. 그러나 선문답에서 법명이 아닌 직함으로 불리는
제하던 뒷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남들에겐 골칫거리 자들은 하나같이 미련하다. 말길을 못 알아들은 시자는 부
이고 천벌일지언정 그녀에겐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자 채에서 부채만 보는 계급주의자다. 본래는 절을 하거나 한
아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방 먹였어야 했다. ‘내 부처는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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