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고경 - 2015년 10월호 Vol.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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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들어가는 1인의 황제가 자행했다. 북위(北魏)의 태무제 하던 선종(禪宗)은 법난에도 크게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전
(446년), 북주(北周)의 무제(574년), 당(唐)의 무종(842년), 후 언이다. 불사의 공덕을 들먹이며 백성들로부터 ‘삥’을 뜯지
주(後周)의 세종(955년)이 장본인이다. 이 가운데 무종(武宗) 않은 과보다.
의 핍박이 가장 엄혹했다고 전한다. 4600곳의 절이 폐사됐 ‘웃음거리’란 결국 부질없는 것을 의미한다. 한밤의 찬 기
고 26만 명의 승려가 환속해야 했다. 서기 842년부터 847 운에 얼어버린 물도, 날이 밝으면 속절없이 녹게 마련이다.
년까지 5년간이며, 그즈음의 연호(年號)가 회창이었다. 나뭇가지에서 외줄을 타는 학의 자태와 재능 역시, 상식적
법난이 발발한 시기는 제각각이나, 일어나게 된 원인은 대 인 관점에선 달밤의 체조요 한낮의 ‘쌩쑈’다. 인생은 무상하
동소이하다. 불교의 지나친 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특단의 며, ‘잘 나가는’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위태롭다. 높이 오
조치였다. 시주로 돈을 모으고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불린 른 새가 멀리 본다손, 떨어졌을 때 더 아픈 법이다. 세월이
사원경제는 나날이 비대해졌다. 돈이 된다 싶으면 술도 팔았 흘러서 허물어지는 것들은 서럽고, 혼자만 옳다고 우기는
고 매춘부도 부렸다. 납세와 병역을 피할 요량으로 출가하는 것들은 역겹다. 그러므로 관건은 풍화와 굴욕을 흔연히 받
사내들 또한 넘쳐났다. 승가의 부패와 타락도 문제였으나, 아들이는 일. 설령 웃음거리를 보더라도 심지어 되더라도,
무엇보다 나라의 재정을 축내고 국력을 위협하니 여지가 없 ‘웃음’과 ‘거리’를 두는 일.
었던 셈이다. 당시의 황제들이 불교와 경쟁했던 도교를 좋아
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여하튼 교단이 무너지고 부처님이 【제29칙】
능욕을 당했으니 많은 불자들이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풍혈의 무쇠소(風穴鐵牛, 풍혈철우)
호법선신 운운하는 승려의 물음엔 뼈가 있다. 구원의 손
길을 내밀지 않은 신들에 대한 원망이다. 삼문은 절의 입구 풍혈연소(風穴延沼)가 영주(郢州) 관아에 초청돼 법문을 했
인 일주문을 비롯해 사천왕문과 금강문, 불이문과 해탈문을 다. “조사의 심인 (心印)은 모양이 무쇠소의 선기(禪機)와 같
가리킨다. 추상적으로는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을 뜻 아서 도장을 찍고 그 도장을 치우면 찍은 자리가 나타나
하며 문들을 거치면서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비우고 바로 보 지만, 찍은 채로 놔두면 찍혔는지 안 찍혔는지 알 수가 없
는 것이다. 눈을 반쯤 뜬 불상은 쇠붙이요 눈을 부릅뜬 사 다. 그렇다면 도장을 찍은 채 그대로 놔둔다면 찍는 게 옳
천왕상은 나뭇조각에 불과하다. 허상(虛像)은 무능하며 기껏 은가, 찍지 않는 게 옳은가?” 이때 노피 (盧陂)라는 장로가
해야 아름다울 뿐이다. 한편 농사를 통한 자급자족을 견지 나서서 말했다. “저에게는 무쇠소의 선기가 있으니 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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