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고경 - 2015년 11월호 Vol.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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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대수는 세계가 사라지면 불법(佛法)도 사라질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부처님도 하나님도 믿음도 수행도 지구멸
망 앞에선 ‘말짱 꽝’인 셈이다.
객승은 목숨을 걸고 깨달음을 구하던 벽창우였을 것이다.
도(道)가 불타 없어지는 게 몹시 안타까웠는지 겁화를 따라
가겠단다. 쉽게 말해 분신하겠다는 것이다. 객승의 위법망구
(爲法忘軀) 정신이 활화산이라면, 대수의 무심함은 시베리아
얼음장이다. ‘그래, 타죽으라’며 등을 떠미는 모양새다. 냉혹
한 노인네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만 어쩔 수 없이 허망한 일이다. 허망함을 이길 수 있는 길 에서 드러난다. 오랜 고민은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 다만 확
은 허망함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객승은 죽음을 택 률을 높일 뿐이다. 결단과 책임에서 참다운 자유가 싹튼다.
했다. 대수가 자살을 방조한 까닭도 이러한 연유로 보이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
데, “따라가거라.”는 말투엔 일견 조롱기가 섞여 있다. 앞뒤 만 더럽히지만 말라.”고 했다. 진실이란 이름으로 혹은 양심
못 가리는 불나방을 무슨 수로 말리겠냐는 듯. 이란 이름으로 마음에 자꾸 뭘 쌓아두어 어지럽히지 말라
진리가 궁극엔 어느 하나로 수렴된다고 믿는 경향은 보편 는 이야기다. 시답잖게 흘러가는 낱낱의 일상이 모여 삶이
적이다. 신 (神)이라든가 하늘이라든가 도(道)라든가 등등. 반 되는 법이다. 어딘가 다른 곳을 구하는 순간, 지금 여기는
면 선사들은 무엇보다 실체화를 철저히 경계했다. 맹신을 유 감옥이 된다. 한쪽만 보고 죄악이라 욕하면서.
발하는 탓이고 폭력으로 이어지는 탓이다. 꽃의 진면목은 대천세계가 마음에서 일어난 땅이듯 ‘참나’ 역시 마음에
꽃잎에도 줄기에도 뿌리에도 따로 있지 않다. 꽃의 전체와 서 일어난 한 조각 불똥이다. 이른바 ‘참나’란 영원하고 고귀
꽃이 살아온 날들의 총합이 꽃이다. 한 ‘나’라는 상태가 아니라, 특별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
이른바 ‘내면 (內面)’에 대한 신뢰도 의뭉스럽다. ‘마음의 소 다는 통찰이다. 감인대(堪忍待). 이러니저러니 해도 삶은 결
리’는 그럴듯하지만 망상일 따름이다. 열매의 본질은 씨앗이 국 견딤이고 참음이고 기다림이다. 정진의 출발은 그리하여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의 의미는 깊이가 아니라 선택 멈춤이고 정진의 대가는 쉴 줄 아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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