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고경 - 2015년 12월호 Vol.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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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가법문이 참으로 압권이다.

            “오빠는 살아서도 괴각질로 대중을 피곤하게 하더니, 죽
          어서도 세상인정을 따르지 않는구려!”
            그러고 나서 툭 치니 그제야 넘어졌다. 이런 우여곡절 끝
          에 무사히 다비를 마쳤다.
            『보림전』 권4의 기록에 의하면 사야다 존자는 하루에 예

          불을 6번 할 만큼 모범수행자였다. 그런데 특이한 열반모습
          을 남겼다. 거꾸로 선 자세로 열반한 것이다. 입관(入棺)을 위
          해 전대중이 힘을 모았으나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

          다. 신통력이 최고라는 주변의 아라한들까지 불러 도움을
 일타 법전 성철 혜암 스님이 함께 한 모습. 법전 스님은 성철 스님을 평생의 스승으로   청했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이 완력과 법력을 포기하고 인
 모셨다.
          정에 호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은봉 원조”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다. “드뎌 발견!” 등은봉   “저희들이 다비를 하고자 하니 스승께서 본래의 자리로
 선사가 누구던가? 당나라 때 선의 거장 마조 선사의 제자가   내려오시길 간절히 청하옵니다.”

 아니던가. 앉아서 혹은 서서 돌아가신 이들은 더러 있다. 그  대중들이 정성을 다해 향을 피우며 한 마음으로 고개를
 래서 좌탈입망(坐脫立亡)이란 사자성어가 생겼다. 그런데 등  조아리자 그제야 저절로 넘어졌다.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은봉 선사는 물구나무 자세로 열반한 전무후무(알고보면 前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有後無다)한 기록을 남긴 기인이다. 평소에도 대중 속에서 어  등은봉 선사가 젊은 시절에 『보림전』을 열독했다는 기록
 깃장을 놓던 괴각인지라 그 별난 임종모습에 모두 혀를 끌  은 남아 있지 않다. 다행이다. 읽었다면 짝퉁이 될 것이요,
 끌 찼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다비장소로 옮기려고   읽지 않았다면 또 다른 명품이기 때문이다.
 전 대중이 힘을 합해 들려고 해도 꿈적도 않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장작을 쌓아 태우려고 해도 주변의 목조건물들 때  원철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장이며,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해인사, 은해

 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누이동생 비구니를   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의 연구・번역・강의로 고전의 현대화에 일
          조하면서,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서 주변과 소통하고 있다.『집
 불렀다. 때론 법력보다 핏줄 힘이 더 영험이 있기 때문이다.   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않다』외에 몇 권의 산문집과 번역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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