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고경 - 2015년 12월호 Vol.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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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비는 이 도량의 창건과정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

 제 수많은 당우와 당우의 처마가 서로 이어져 그 위용과 규
 모를 자랑하는 팔공산 제일가람이 되었다.
 올 가을(2015년)에 낙성된 20여 평의 조사전에 은사스님
 의 영정을 모셨다. 동국대 미술학과 손연칠 (孫連七, 1948~ )
 교수의 작품이다. 늘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내셨던 당신의 모

 습을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했다. “바위는 허공에 멈춰 서 있
 고 불은 물 속에서 타고 있는데 맑은 바람이 밝은 달마저
 털어내니 선사께서는 짚신 한 짝을 내보이셨도다.”라는 영정

 찬(影幀讚)을 통해 담백한 삶을 추구했던 노사의 품성과 스
 승을 그리워하는 후학들의 그리움을 함께 녹여냈다. 그리고
 생전의 일상생활 사진 몇 점과 가사, 장삼, 발우 등 유품을
 함께 진열해 놓았다. 헌화하면서 스승께 입은 하해(河海)와
                                                도림법전 대종사 진영
 같은 은혜에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조사전은 본래
 인근 진여암의 법당이었다. 노사께서 손수 치목 과정부터
 낙성까지 간여한 작품이기도 하다. 선사의 땀 냄새가 스며있  길이 멈춘다. 대부분의 선지식들이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는 건물을 그대로 해체하여 옮긴 선각(善覺) 스님의 수고로  스스로 화염을 일으켜 다비를 마친 후 땅 위로 사리가 쏟아

 움도 같이 읽혀졌다. 바로 곁에는 추후 건립할 부도와 탑비  졌다는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 장례과정의 번거로움을 생각
 의 기반공사까지 마쳐놓은 상태였다.   한다면 마지막까지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스스로를 화장할
 그 와중에서 원고마감을 독촉하는 문자가 들어온다. 책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야말로 ‘장렬
 상 위에 붉은 줄이 죽죽 그인 『보림전』의 교열작업은 여전  한 산화’라 하겠다.) 더불어 혹여 서운해 할 후학들을 위해 영
 히 지지부진하다. 그럼에도 교정과 윤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롱한 보석 사리를 남겨두는 자비심 또한 잊지 않았다.

 ‘보림별어’의 글 자료를 찾기 위해 쭉 훑었다. 시절이 시절이  모범사례는 훌륭하긴 해도 이야깃거리는 되지 못한다. 선
 니 만큼 서천 (西天: 인도) 땅의 28명 조사의 열반 모습에 눈  종의 20조인 사야다 존자의 마지막 부분에 붉은 글씨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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