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고경 - 2016년 2월호 Vol.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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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야 하고,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봄비가 내려야 하고, 광

          합성을 할 수 있는 따사로운 햇살이 필요하고, 새싹을 자라게
          하는 토양 속의 자양분들이 필요하다.
            존재의 관계성은 이와 같은 1차원적 연결망으로 끝나지 않
          는다. 국화를 피게 했던 훈풍, 봄비, 햇살, 토양 속의 자양분
          역시 수많은 연결망 속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한 송이 국화꽃은 그 스스로 싹을 틔우거나 자
          란 것도 아니고, 스스로 꽃을 피운 것도 아니다. 국화는 국화
          가 아닌 무수한 타자들과의 복잡한 연결망 속에서 비로소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국화의 씨앗을 인 (因)이라고 한다
   천태지의 스님
          면 그 인을 싹트게 하는 무수한 조건을 연 (緣)이라고 한다. 결
 모든 것이 공하다(一切皆空)’고 했다. 불교사상하면 곧 공을   국 하나의 존재는 무수한 조건들에 의존해 있으며, 그 스스
 떠올릴 만큼 공은 불교의 핵심적 사상이다. 그런데 공이라고   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연기설이다. 공(空)이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음(Nothingness)’을 떠올린  바로 그와 같은 연기적 존재를 설명하는 교설이다.
 다. 그러나 중론이나 천태에서 말하는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천태지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모든 존재는 “연 (緣)에서 생
 ‘텅 빔’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은 완전한 ‘무’가 아니라 모든 존  기니 연에서 생기면 주체가 없으며 (緣生卽無主), 주체가 없으
 재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연기 (緣起)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 때  니 곧 공이다(無主卽空).”라고 했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조건

 문이다.     의 화합으로 생성된 것이므로 개별적 존재는 그 어떤 주체도
 언뜻 보기에 모든 존재는 그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我]’라는 실체도 있을 수 없고, ‘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어떤 존재도 독립적 실체로 존재하  의 것 [我所]’이라는 소유도 성립될 수 없다. 부처님은 이것을
 는 것은 없다. 일례로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연기’ 또는 ‘무아’라고 했고, 용수 보살과 천태 대사는 이를

 꽃이라는 실체가 본래부터 있어서 핀 것은 아니다. 토양 속에   ‘공(空)’이라고 표현했다.
 국화의 씨앗이 파종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조건이 갖  모든 존재는 스스로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공’이기 때문에
 추어져야 국화는 필 수 있다.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훈풍이   수많은 타자들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국화가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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