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고경 - 2016년 2월호 Vol.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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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틔우려면 국화의 씨앗은 씨앗이라는 실체로 고정되어 있지 혜문 선사가 삼제계를 ‘일심삼관’으로 파악하는 순간 존재
않아야 한다. 씨앗이 씨앗을 고집하면 싹으로 변화할 수 없기 론은 이미 인식론의 의미를 띠게 된다. 눈앞에 삼라만상이 펼
때문이다. 씨앗이 자기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스스로 무가 되 쳐져 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거짓 이름인 ‘가(假)’에 불
고, 공이 될 때 비로소 씨앗은 싹으로 피어나고, 마침내 한 송 가하다. 타자를 전재로 하지 않으면 개별자는 있을 수 없기
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수많은 인연이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통찰할 때 자기 자신에 바른 인식도
화합해서 생성되고(緣生), 또 수많은 인연들에 의해 소멸한다 가능해진다. 나는 무수한 타자들의 은혜 속에 존재하고 있기
(緣滅). 인연에 의해서 생성되고, 인연에 의해 소멸함으로 모든 때문이다. 스스로 잘난 것 같고, 자신이 제일 훌륭한 것 같지
존재는 개체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렇게 보면 공은 만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타자들의 참여로 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과의 복잡 다. 이런 통찰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이 생겨나고, 타인
한 상호관계 속에 있는 존재의 역동성에 대한 진술이다. 을 존중하는 공경의 마음이 나타난다. 작은 먼지조차 소중하
그렇다면 눈앞에 존재하는 한 송이 국화꽃은 아무런 의미 게 바라보는 안목이 열리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공존의
도 없는 것인가? 분명히 눈앞에 한 송이의 국화꽃은 존재하 태도가 가능해진다.
고 있고, 꽃을 피게 한 무수한 조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뿐 결국 삼제원융은 존재의 실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
만 아니라 씨앗을 적시는 빗물도 있고, 비구름을 몰고 오는 는 가르침이 되며,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
바람도 있고, 새싹을 자라나게 하는 자양분과 박테리아들도 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론이 될 수 있다.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존재들은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
이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눈앞에 펼쳐
진 모든 존재들은 독립적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은 거짓 존재임으로 이를 ‘가유(假有)’라고 한다. 불변하는 개
체적 실체로서 존재는 없지만 눈앞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펼
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삼제원융 사상은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 존
서재영 ●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
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의 실상에 대한 성찰은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등을
거쳐 현재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
곧 우리들의 인식과 마음가짐에 대한 성찰로 확장된다. 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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