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고경 - 2016년 2월호 Vol.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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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포함한 일체의 고(苦)로부터의 해탈이었다. 여기서 해탈  성격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다.

 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인도철학 전반의 공통된 목표였다. 고  다시 일인론으로 돌아가 보자. 이들은 이 세계가 브라흐만
 에서 벗어난 경지가 바로 해탈인 것이다. 다만 그것에 이르는   에 의해 창조되었고, 개개의 인간 속에 브라흐만의 속성이 그
 견해와 방법 등이 달랐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셨던 인도에서  대로 구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개별자 속에 들어와 있
 는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생겨났다. 성도한 이후 부처님은 두   는 브라흐만을 아트만(A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가지 극단을 벗어나 ‘중도(中道)’를 증득했음을 천명하시는데,   아트만은 인간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으므로 육체의 유한성

 두 가지 극단 가운데 하나로 일인론(一因論)과 무인론(無因論)  때문에 그 능력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을 들 수 있다.   요가(Yoga)를 통해 아트만이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궁극적
          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보았다.

 ● 일인론(一因論)과 무인론(無因論)  그렇다면 이들이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논의의 근거는 어디
 일인론은 단일한 하나의 원인에 의해 이 세계가 이루어졌  에 있는가? 브라흐마니즘에서는 하나의 단일한 원인으로부터
 다는 견해로서 인도의 브라흐마니즘을 가리키고, 무인론은   이 세계의 다양한 것들이 출현했다고 가정 (假定) 혹은 단정
 이 세계에 벌어지는 여러 일들은 원인 없이 생긴다는 극단적   (斷定)하지만, 불교도들은 오히려 이들이 우리가 일상에서 사
 유물론의 견해를 가리킨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를 벗어나 인  용하는 ‘말’을 잘못 신비화시키고 추상화시켜서 이런 이론을

 연 (因緣)의 인과론(因果論)을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앞의 두   도출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가령 우리가 일생동안 가장 많
 가지 이론을 지양했던 것은 앞의 두 이론 모두 사람들의 현  이 사용해서 의식의 저 깊은 곳까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말
 실적인 노력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원  은 바로 ‘나’일 것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

 인으로부터 발생했고 그것에 의해 주재된다면 현실에서 우  의 차를 타고 ‘나’의 직장에 출근하여 ‘나’의 일을 마치고 다
 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바는 없을 것이고, 모든 것이 원  시 ‘나’의 집으로 돌아와 ‘나’의 가족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인 없이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나’의 휴식을 취한다.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불교도들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저 인도의 일인론자(一因
 데 팥 나는 것처럼, 다양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 세계가 움  論者)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말에 대해

 직인다고 설하셨다. 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원인과 결과의 범  사유하다가, 우리 몸속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
 위는 단시간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몇 생을 통해 관철되는   ‘나’야말로 영원하고[常], 즐겁고[樂], 참된 자아이고[我], 깨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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