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고경 - 2016년 3월호 Vol.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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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분이고 뭐든 할 수 있는 능 조계총림보다는 조금 자유로운 것 같고요. 그래도 선사(禪師)
력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출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혼자 들이 많이 계셔서 대중들을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영축총림
한라산에 올라 며칠씩 고민하기를 여러 번. 몇 개월이 훌쩍 통도사는 총림이 되기 전에 몇 철 살았어요. 극락암 호국선원
지났다. 결심이 섰다. 에서는 거사님들과 함께, 통도사 보광선원에서는 보살님들과
“육사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나서는 원자력 공학을 공부해 함께 정진했어요. 재가자들과 같이 있다 보니 함부로 졸 수
서 교수가 되는 것이 당시의 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없었습니다. 하하.”
살아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다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결심을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의 많은 선지식 (善知識)들을 가까
했어요. 부처님처럼 진리를 찾는 사람이 되어 보자고요. 부처 이에서 모시기도 했다.
님이 되지 못해도 후회를 할 것 같지는 않았어요.”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분이라고 하면 성철 스님을
출가 결심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어머니의 대답은 “네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교(禪敎)에 두루 능통했고, 총림
가 출가하면 나는 죽는다.”였다. 스님은 어머니의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무덤 만들어 놓고 출
가하겠습니다.” 아들의 강경한 뜻에 어머니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스님은 출가를 결행해 부산 범어사로 갔다. 제
주도에서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부산이
었기 때문이다.
범어사 객실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거기서 만난 스님이 나
주 다보사행을 추천했다. 그렇게 인연이 이어져 결국 우화 스
님을 은사로 수행자가 되었다.
스님은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공부했다. 또 토굴에서도 짧
지 않은 시간동안 정진했다. 스님이 겪은 총림 선원의 풍경은
어땠을까?
“조계총림 송광사는 아마 총림 중에서 제일 보수적인 가풍 담담히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적명 스님
같습니다. 여법하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해인총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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