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고경 - 2016년 3월호 Vol.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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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우리는 “설사 불교에서 말하는 실상론이 진리 이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고, 그것이 옳다고 한들 당장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에 공을 철저히 깨달으면 가를 알게 되고, 가를 철저히 알게
게 무슨 소용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런 반문은 오랫동 되면 공을 알게 되므로 공과 가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
안 불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자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은[不一不二]’ 중도의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이 존재의 세 특징
하지만 인간의 번뇌와 고통이 존재의 실상을 바로 깨닫지 못 을 ‘삼제 (三諦)’라고 하고, 그것이 상호 소통하는 중도적 관계
한 ‘무명 (無明)’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고 에 있으므로 삼제원융이라고 한다.
(苦)의 근원적 뿌리가 무명이라면 존재의 실상을 바로 깨달아 문제는 그와 같은 존재의 실상이 아무리 고원한 진리라고
야만 그 뿌리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상을 밝히는 것 할지라도 그것을 내면화하지 못하면 나와 무관한 고담준론
은 존재를 규명하는 것인 동시에 인간의 근원적 고를 해소하 이 되고 만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가 고통의 뿌리라면
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고 이해하는 것은 고를 해소하는 길이
그렇다면 존재를 규명하는 실상론과 그에 대한 이해가 어 된다. 따라서 삼제원융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내면화하고 나
떻게 마음의 평화와 삶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천태 의 안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삼제원융을 바로 이해해야 한
학에서는 삼제원융(三諦圓融)과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이 다. 성철 스님도 “일체 제법이 원융한 삼제의 도리를 구비하였
두 영역을 관계 짓고 있다. 다고 하여도, 이것을 바르게 관찰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태대사는 존재의 실상을 낱 수고로운 일일 뿐”이라고 했다.
삼제원융으로 설명한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공가중(空假中) 불교는 단지 객관세계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한 과학과 같
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파악한 것이 삼제원융이다. 타자와 은 학문이 아니다. 객관의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통
의 관계를 떠나 독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으므로 모든 존재 해 진리를 내면화하여 고의 뿌리가 되는 무명을 밝히는 것이
의 본질은 공(空)하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불교다. 그때 존재의 실상은 비로소 나를 평화롭게 하는 진리
개체적 존재는 공하지만 수많은 존재들과 중층적 관계 속에 가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태학에서도 존재의 실상을 바르
존재하는 연기적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나타난 존재 게 통찰하는 관법 (觀法) 수행을 중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일
는 개체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에 의지해서만 존재하므로 그 심삼관(一心三觀)’이다. 일심삼관은 삼제원융이라는 실상을 철
자체는 가상 즉, ‘가(假)’가 된다. 이처럼 공과 가는 존재의 두 저히 체득함으로써 내면을 밝히는 나의 지혜로 전환하는 관
성질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테제의 핵심은 연기적 관계성 법이다. 성철 스님도 일심삼관이란 “경계로서의 이법 (理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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