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고경 - 2016년 4월호 Vol.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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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 않으면 서로 장단(長短)이 있겠지만, 진실로 오묘한 데  부처이고, 자기 마음이 본래 청정하며, 자기에게 본래 무한한

 에 이르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여실히   지혜와 능력을 다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일상생활을 활기
 구경으로 본래부처이며, 여실이 자재하며, 여실히 안락하며,   차게 실천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여실히 해탈하며, 여실히 청정함을 알아서 일상에 오직 자기   물론, 직장과 가정,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중도 정
 마음을 쓰며, 자기 마음의 변화를 잡아 쓸지언정 옳고 그름  견이 선 사람도 가끔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특히, 큰 경계
 을 묻지 말라. 마음을 분별하여 생각하면 마땅히 옳지 않다.   를 만났을 때가 그렇습니다. 가령,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일을

 마음이 분별하지 않으면 낱낱이 천진하며, 낱낱이 밝고 오묘  겪거나 절이나 스님, 또는 도반에게 크나큰 실망을 할 수도
 하다. 낱낱이 연꽃에 물이 묻지 않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청  있지요. 또 실직이나 좌천, 그리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
 정하여 시비를 초월한다. 자기 마음이 미혹한 까닭에 중생이   게 되면 대체로 불법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조차 흔들리

 되고, 자기 마음을 깨달은 까닭에 부처가 되니, 중생이 곧 부  기 십상입니다.
 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미혹과 깨달음 때문에 이것과 저  하지만, 이럴 때조차 그 상황을 분별의 양변을 떠나 정견으
 것이 있다.”   로 보아야 합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는 양변에서 자기가 옳다
 참선인이 생활하는 마음은 항상 나-너, 옳고-그름이라는 분  는 견해에 집착하니 더더욱 참지 못하고 분노가 끓어 오릅니
 별을 떠나야 합니다. 분별하는 마음으로 양변에 집착하면 마  다. 분별심이든 분노든 자기가 있다는 양변의 집착에서 오는

 음이 시끄럽고 복잡해져 화두 집중이 어렵습니다. 생계를 꾸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의 분노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불법은
 려가는 재가자의 입장에서는 이해 득실을 따지고 치열히 경쟁  옳은 것, 정법, 불법에 대한 집착도 삿된 견해라 하는 것이 불
 해야 하는데 분별을 떠나라 하면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법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 그

 보면 불법은 세속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름이 부처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이다” 하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불법의 중도를 알면 나-너, 선-악,   말을 계속 합니다. 분별망상이나 삿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
 시-비 분별에 집착을 떠난 정견으로 보면 항시 지혜가 나와  처와 불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불법이라는 겁니다. 선문
 서 남을 돕고 잘되게 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면 다   (禪門)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을 씁니다. 참선하
 잘 풀리게 됩니다. 특히 자기 마음이 중도로 되어 있다는 것  는 데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도 비우고, 조사를 만나거든 조사

 을 알고 이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스스로 당당하게 자존감  도 비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철스님은 “옳아
 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중도 정견을 가지면 자기가 본래   도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 천하게 가장 용맹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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