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고경 - 2016년 5월호 Vol.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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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대상에 대한 강고한 집착이 발생하고, 그런 집착으로 인해 가 되고, 불자의 삶은 현실에 대한 부정과 은둔의 삶으로 이
번뇌가 치성해지고, 그로 인해 삶 자체가 고통으로 점철된다. 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또 하나의 극단이자
무아와 공은 그와 같은 왜곡된 유론에서 비롯된 집착을 변견 (邊見)이며, 그런 변견으로부터 또 다른 번뇌와 고통이 발
해소함으로써 번뇌를 제멸하고, 중생들의 마음에 평화를 주 생한다.
기 위한 처방전이다. 그러므로 무아와 공을 바르게 받아들이 무와 공에 대한 염세적이고 부정적 이해를 ‘낙공(落空)’이라
면 자연히 나와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무엇 고 한다. 허무주의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며 모든 것을 부정하
을 소유하고 얻고자 하는 집착의 주체인 내가 존재하지 않으 고, 염세적 삶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낙공의 태도를 갖게 되
며, 소유하고 누리고 싶은 대상 자체가 공하다면 그것을 향한 면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하는 실천도 무의미해지고, 세상을
갈애는 무의미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질주하는 맹목적 삶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원력도 사라지며, 고통 받는 이웃을
부질없기 때문이다. 돕고자 하는 자비행의 실천도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처럼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을 해소하기 위해 제시되
는 대표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가 바로 ‘수중월 (水中月)’과 ‘경 ● 존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중상(鏡中像)’이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모든 대상들을 볼 때 우리는 비관이 아니라고 하면 곧바로 낙관을 떠올린다. 그
‘물속에 아른거리는 달그림자’처럼 보고, ‘거울 속에 비친 형 렇다면 불교가 비관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라면 낙관주의는
상’처럼 보라는 것이다.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는 매일 불 수용할까? 정답은 불교는 염세주의도 부정하지만 맹목적 낙
전을 향해 낭독하는 축원문에도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는 관주의도 배격한다. 염세나 낙관은 존재의 실상을 보는 것이
표현으로 들어 있다. 우리들은 흐르는 강물에 일렁이는 달빛 아니라 어느 하나의 측면만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변견이며
그림자와 같은 허상을 좇아 욕망하고 질주하며 스스로 고통 극단이다. 따라서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를 허무주의로
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따라서 수중월의 비유는 일체 모든 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교를 왜곡하는 것이며, 한쪽
존재를 바라볼 때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것 측면만을 이해한 것이다. 그렇다면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
임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유가 담고 있는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하지만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를 이렇게만 이해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과 다름없다. “원교란 바로 중도를 나타내어 두 변을 차단하는 것이다.
불교를 이렇게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불교는 염세적 종교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며 (非空非假), 안도 아니고 밖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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