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고경 - 2016년 6월호 Vol.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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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감동하여 꽃을 물고 와서 존자께 바쳤다는 짤막한 서                                       에 모두 달려들어 아이의 팔다리를 각각 잡아당기는 바람에

         술만 남겼다. 새가 꽃을 공양한 것은 우두법융(牛頭法融,                                       사지가 갈기갈기 찢길 판이었다. 순간 위험을 감지하고 신통
         594~658) 선사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감화력의                                 력을 부렸다. 백천 명의 화신이 되어 모든 궁녀가 두루 한 명
         근원은 수행력과 함께 복력도 한 몫 했다. 어릴 때 존자는 전                                    씩 안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궁녀들은 좋아하며 각자 아이
         단향을 잘 캐는 소년이었다. 어느 날 절에서 일만금의 대규                                      를 안고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모 종을 주조하였다. 그런데 그 종을 칠 수 있는 망치가 준비

         되지 않았다. 아무리 크고 잘 생긴 종이라고 할지라도 두드릴                                       ● 진짜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망치가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맷돌의 손잡이인 어처                                        며칠 후 왕이 아이를 찾았다. 그런데 궁녀 백천 인이 각각 한
         구니가 없으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명씩 데리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왕은 깜짝 놀라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관용어로 굳어질 만큼 황당한 경우를 대                                       “같은 아이가 백천 명인데, 도대체 나는 누구를 데리고 왔
         변한다. 소년은 자기가 힘들게 얻은 전단향 나무로 아낌없이                                      는가?(此諸子等 都有百千 我將來者 爲復何是. 『보림전』 권5)”
         종 망치를 만들어 보시했다. 적지 않은 복을 지은 것이다.                                        화두가 될 만한 질문이 던져졌다. 모든 궁녀가 서로 “저요!
                                                                               저요!”라고 손을 들면서 자기아이가 진짜라는 사실을 조금도
           ● 자비심으로 백천의 몸을 나투다                                                  의심하지 않았다. 왕도 헷갈릴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누가 진

           태몽 후 학륵나 존자는 열 달 만에 태어났다. 한낮인데 하                                    짜인 것일까? 어른머리로 헤아리면 해답이 절대로 나오지 않
         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에서 황금이 솟아나 길 위에 가득했                                      는다. 정답은 아이답게 지극히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동
         다. 이런 신비한 현상의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자의 화신 (化身)은 궁궐의 백천 명 궁녀가 각각 안고 있지만

         결국 왕궁까지 전해졌다. 왕은 나라의 보배인물이라고 생각                                       본래 몸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 품안에서 새근새근 자
         하고 궁궐로 데리고 왔다. 평범한 집안출신의 입장에선 신분                                      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승이라는 축복이겠지만 또 다른 면에서 부모와 생이별하
         는 고통이기도 했다.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궁녀에게 맡겨
                                                                               원철 스님  ●          조계종 포교연구실장이며 해인사 승가대학장과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졌다. 궁녀의 숫자는 백천 명이었다. 아이를 본 궁녀마다 자기                                    을 역임했다.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의 연구・번역・강
         가 기르겠다고 서로 고집을 피우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의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면서,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서
                                                                               주변과 소통하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않다』외에 몇 권의 산문집과 번역
         심지어 왕마저도 말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동시                                     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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