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고경 - 2016년 6월호 Vol.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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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린다. 그래서 천태 대사는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고[雙                                     을 깨닫는 순간 오히려 양 당사자가 완전하게 긍정되는데 이
         遮二邊], 바로 중도에 들어가[正入中道] 쌍으로 이제를 비추면                                    를 ‘쌍역 (雙亦)’이라고 한다.
         [雙照二諦]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가 구족된다.”고 했다.                                         셋째는 쌍지쌍관이다. 나와 너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면
                                                                               나와 너가 각자의 방향으로 내달리는 생각과 몸짓은 멈추어
           ● 상호부정을 통한 긍정의 발현과 상호긍정을 통한 부정의 해소                                  야 한다. 너도 너의 진영으로 치닫는 것을 멈추어야 하고, 나
           존재의 실상이 중도라면 쌍차쌍조는 대립과 갈등을 넘어                                       도 나의 진영으로 질주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쌍방이 자

         화해와 공존의 삶을 여는 지혜의 말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기중심적으로 내달리는 질주를 멈추는 것이 ‘쌍지 (雙止)’이다.
         변견을 넘어서는 중도를 강조했고, 역대의 고승들은 중도를                                       철저하게 나와 너라는 관점을 버리고 자기진영으로 치닫던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설명방식을 동원                                       행위를 멈추면 그때 양측을 모두 관조할 수 있는 ‘쌍관(雙觀)’

         했다.                                                                   의 안목이 열린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을 멈추면 비로소
           첫째는 쌍민쌍존이다. 존재의 실상은 나와 너로 구분되어                                      서로가 모두 보이는 것이 쌍관이다.
         있지 않고 서로 의존해 있다. 실상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                                       넷째는 쌍차쌍조이다. 나만 옳다는 나 중심적 생각과 행동
         재는 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 혼자 존재하는 나도 없고, 너도                                    도 막아야 하고, 반대로 너만 옳다고 고집하는 생각과 행동도
         없다. 따라서 존재의 실상을 바로 드러내자면 나와 너가 모두                                     막아야 한다. 이렇게 쌍방의 변견과 행위를 철저히 막는 것이

         사라져야하는데 이를 ‘쌍민 (雙泯)’이라고 한다. 쌍민을 통해                                    ‘쌍차(雙遮)’이다. 철저히 부정하면 양측이 모두 사라지고 마
         대립하고 투쟁하는 모습이 사라지면 양측이 모두 없어지는                                        는 무(無)가 아니라 오히려 양측이 오롯하게 드러나는 ‘쌍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측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쌍존(雙存)’이                                    (雙照)’의 지평이 열리게 된다.

         실현된다.                                                                   이처럼 나와 너,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부정하는 것을 ‘쌍
           둘째는 쌍비쌍역이다. 존재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차이변 (雙遮二邊)’이라고 한다. 양쪽이 동시에 왜곡된 생각을
         나와 너로 갈라져 서로 옳다고 고집하는 자기중심적 인식이                                       내려놓고, 잘못된 방향으로 내달리는 질주를 멈추고, 자신만
         해체되어야 한다. ‘오직 나만’이라는 인식도 틀렸지만 반대로                                     의 배타적 주장을 버리는 것이 쌍차이변이다. 쌍차를 통해서
         ‘오로지 너만’이라는 생각도 틀렸다. 이처럼 자신만 옳다는 나                                    대립하고 갈등하는 울타리는 해체된다. 나와 너, 진보와 보수,

         와 너의 배타적 태도를 부정하는 것을 ‘쌍비 (雙非)’라고 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은 쌍방이 둘러친 두 겹의 울타리다.
         나만 고집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너만 내세우는 것도 틀렸음                                       따라서 한쪽만 부정해서는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 쌍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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