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고경 - 2016년 6월호 Vol.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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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3칙                                                                  53칙은 배휴를 만나고 난 뒤에 있었던 법문으로 추측된
           황벽의 술지게미(黃蘗噇糟, 황벽당조)                                                다. “본래면목을 깨닫지 못한 배휴 당신도 별 볼일 없는 인간”
                                                                               이라며 멋지게 한방 먹이긴 했으나, 아무래도 시원찮은 승가
            황벽희운(黃蘗希運)이 법상에 올라 꾸짖었다. “그대들은                                     의 현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얼마나 깨우친 도인이 드
            모두 술지게미나 씹는 꼰대들이다! 그렇게 살아서야 어찌                                     물면 바깥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했겠느냐며 제자들의 정진을

            오늘이 있었겠는가? 나라 안에 도무지 선사(禪師)가 없                                     독려하는 품새다. 웃전이 먹다 남긴 술잔이나 탐하지 말고 직
            다는 걸 알고는 있는가?” 이에 어느 승려가 나서서 따졌                                    접 담가 마시란다.
            다. “그렇다면 지금 전국에서 무리를 이끌고 대중을 교화                                      먹고 자고 싸고 일하고 욕먹고 일하고 싸고 자고 먹고 욕먹

            하는 분들은 무엇입니까?” 황벽이 말했다. “내가 선 (禪)이                                 는 일생은 일생이어도 무생 (無生)이다.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없다고 했냐. 선사가 없다고 했다.”                                               뿐. 평생을 살았어도 살지 않았음이라. 그러므로 삶이란 무의
                                                                               미와의 지난한 싸움인 것이다. 육신은 유한해도 법신은 영원
           『선문염송』에는 황벽과 배휴(裵休)의 일화가 실렸다. 고위                                    하다고 했다.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고 남에게 결실
         관리이자 재가수행자였던 배휴가 어느 날 절을 찾았다. 법당                                      이 되는 무언가를 기어이 남겨야 한다. 비록 그것이 싸구려라

         에 걸린 고승들의 진영을 보고는 괜히 심술이 났다. “이 초상                                    도 절망이라도 심지어 헛것이더라도. 자꾸만 배를 뚫고 나오
         화들은 무엇이오?” 절의 살림을 맡아보는 원주(院主) 스님이                                     는 ‘마음의 소리.’ ‘집 나간 집’의 행방을 쫓는다.
         답했다. “큰스님들의 초상화입니다.” “그림은 볼 만한데 도대

         체 큰스님들은 어디에 계시오?” 과연 큰스님이라 받들 만한
         인물들인지 의심스럽다는 빈축에, 원주는 말문이 막혔다.
           득의양양해진 배휴는 “여기 참선하는 스님이 있기는 하느
         냐?”며 또 한 번 이죽거렸다. 원주가 황벽을 추천해 그에게 갔
         다. 배휴는 원주에게 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황벽의 속을 긁                                     장웅연    ●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황벽은 느닷없이 “상공(相公).”하고                                   일하고 있다. ‘장영섭’이란 본명으로 『길 위의 절』,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 『떠
                                                                               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한국
         배휴를 불렀다. “예.” 배휴가 대답을 하자 황벽이 어디에 물었                                   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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