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고경 - 2016년 7월호 Vol.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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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별어  ●  글 _ 원철 스님  객실에 몸을 뉘었다. “나무내비보살마하살.”



            ● 백제유민의 흔적을 만나다
 백만군대를 향해   밤에 도착해 쉰 누각은 컴퓨터글씨체로 새긴 ‘백제루’였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북과 운판, 목어 등 사물이 함께 달
 오른손으로    려 있다. 아침햇살에 비친 안내판을 읽어 내려갔다. 1997년


          에 창건한 새 절이었다. 2008년 ‘백제삼천범종’ 타종식 날 어
 배를 두드리며 대갈일성하다  디선가 송아지 아홉 마리 (백제유민의 환생?)가 찾아와 함께 종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부터 지역민들에게 ‘우종

          (牛鍾)’또는 ‘소종’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영험 있는 종이었다.
          2015년 ‘백제극락보전’을 낙성하고 현재 단청작업만 남겨 놓
          았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대왕 위혼비’가 절 마당 가운데
 ● 고산사를 찾다  외로이 서있다.
 이미 사위는 어두워졌다. 여름 낮이 긴 것만 믿

 고 늦게 출발한 것이 화근이었다. 초행길인지라 오직 내비게  ●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션만 믿을 뿐이다. 큰길을 빠져나갔다. 자동차도로와 나란  이 절의 창건주인 최병식 박사는 어느 날 문중의 선산인
 히 달리는 농로를 따라 ㄱ (기역)자로 꺾었다. 다시 도로 밑을   고산(高山, 옛 이름 운주산)이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근거지인

 지나가는 굴다리를 지나 ㄷ (디귿)자로 꺾으라고 알려준다. 고  주류성 (周留城)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운주산성은 그 흔
 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 산길로 진입한다. 이제 정말 아무   적이었다. 그것을 알고 난 후 삼천 명의 유민이 몰살당했다는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뿐이다. 길을 안내하는 인로왕보살인   삼천굴 찾기를 발원했다. 아무리 1500년 전의 일이지만 ‘불을
 ‘내비양’이 오작동하지 않기만 바라면서 오르막을 숨 가쁘게   때면 운주산 꼭대기에서 연기가 났다’는 구전으로 미루어 보
 밟았다. 다행히 갈림길에 ‘고산사’ 사찰표지판이 서있다. 헤드  건대 엄청나게 큰 동굴이었을 텐데 도무지 흔적이라고 아무

 라이트 불빛 끝자락에 누각이 설핏 보인다. 더듬거리며 주차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을 정녕 찾으려고 한다면
 장에 차를 세웠다. 문 밖까지 마중 나온 도반의 안내에 따라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주변인의 말을 듣고 이 절을 창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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