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 - 고경 - 2016년 7월호 Vol.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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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시 전몰 삼천 영가들을 위해 늘 기도하는 도량으로 만  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전쟁터에서 스님들이 군인처럼 활

 들었다. 더불어 불혹의 나이에 고고학을 공부했고 사재를 털  약한 역사도 한국불교 역사만큼이나 길다고 하겠다.
 어 연구소도 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으니 원하는 결
 과가 있을 것이다.       ●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제일이다
            바수반두의 제자인 22조 마라나 존자는 나제국의 둘째왕
 ● 승려와 장군의 모습을 겸하다  자 출신이다. 당시에 코끼리를 탄 백만 명의 기병이 쳐들어온

 전쟁터에는 늘 종교인이 함께 하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다고 하니 조정은 전전긍긍했다. 할 수 없이 왕은 바수반두에
 군종병이야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때로는 참모로, 심지어 장  게 자문을 구했다. “군사도 필요 없고 칼도 필요 없습니다. 오
 군도 더러 있었다. 승려이면서 장군인 도침 (道琛, ?~661) 스님  직 태자의 일갈(一喝)만 필요합니다.”  긴가민가하면서도 별다

 을 여기서 만났다. 백제멸망 후 남은 유민들은 임존성에서 부  른 방책이 없는지라 바수반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왕의 명
 흥운동을 하다가 도침 대사가 이끄는 주류성에 합류하여 항  령에 따라 태자는 성 남쪽에 도착했다. 백만 군대를 향해 오
 전을 했다는 지역이다. 경내 도침당에는 도침 대사 영정을 모  른 손을 들어 올려 복부를 치면서 크게 한번 소리를 내질렀
 셨다. 삭발에 장군복장으로 두 눈이 부리부리한 모습이다.   다. 그러자 땅이 진동을 했다.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백만 기
 『개암사 불복장 별기』에 의하면 스님은 부안 개암사를 창건  병이 땅바닥에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보림전』

 한 묘련(妙蓮) 대사의 제자  권4)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전술이라고 『손자병
 라고 한다. 부여 은산면에서   법』에서 말했다. 마라나 존자는 출가 전에 무기를 사용하지
 열리는 ‘은산별신제’에서는   않고 고함만으로 적을 제압한 ‘장군이력’을 가지고 있다.

 도침 스님을 ‘토진대사’라고
 부른다. 당시에 수천 명이 스  백만의 코끼리 부대를 꺾기 위하여 (爲催百萬象)
 님과 함께 머물던 곳이었으  배를 두드리며 신통력을 부렸도다.(鼓腹作神通)
 니 당연히 사찰도 있었을 것
          원철 스님  ●          조계종 포교연구실장이며 해인사 승가대학장과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이다. 혹시 이 자리가 옛 절   을 역임했다.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의 연구·번역·강
 자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도  의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면서,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서
          주변과 소통하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않다』외에 몇 권의 산문집과 번역
   세종시 고산사 도침당 영정  침 대사는 1500년 전 장군  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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