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고경 - 2016년 9월호 Vol.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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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불교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1985년 불광사에서 광덕
스님으로부터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기르라’는 뜻의 법명 도
해 (道海)를 받았다. 1986년 한 미국 건축가의 통역을 위해 간
서울 봉원사에서 조화로운 단청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문득
전율을 느꼈고, 그 길로 봉원사 만봉 스님에게 청해 탱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만봉 스님 문하에서 밑그림만 수천 장을 그리던 그는 2년
만에 정식 제자가 됐고, 1985년 제11회 대한민국 불교미술대
전 입선, 1990년 같은 대회 특선 등에 올라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태국 왕실사원의 부탁으로 탱화를 그
분향하는 원영 스님의 모습 려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명실공히 불모(佛母)가 된 그는
온종일 방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수행
성껏 따라 올리고 있을 겁니다. 내 동생 브라이언 배리! 쑥 들 으로 삼았고, 2006년 만봉 스님이 입적하자 유족들이 가족
어갑시데이~~~” 회의를 통해 “완성을 부형에게 맡기자”고 할 정도로 그의 실
미국 코네티컷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배리 법사는 23 력과 열정은 유명했다.
세였던 1967년 평화봉사단으로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를 찾 성철 스님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 『이뭐꼬』를 영
았다. 당시 2년 계획으로 활동한 봉사단원들은 변변한 화장 어로 번역해 『Echos from Mt.Kaya(가야산의 메아리)』를 출간
실 하나 없던 환경에 경악했지만 그는 “바다 냄새, 꽹과리 소 했으며, 법정 스님 수필 중 65편을 가려 뽑아 『물소리, 바람
리를 잊지 못하겠다.”며 대학 졸업 후 돌아와 아예 한국에 터 소리 (The sound of water, The sound of wind)』란 책을 엮어내기
를 잡았다. 스스로를 ‘부안 부씨’라고 칭한 건 이때부터였다. 도 했다. 한국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9년 정부로부터
지인들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를 ‘부형’이라 화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고 불렀다. 49재를 지낸 정심사 주지 원영 스님은 “한국불교를 세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발길을 재촉한 건 처음부터 불교의 영 알리고자 했던 브라이언 배리 법사가 실현하고자 했던 것들
향이 컸다. 1979~98년 대우그룹에 근무하며 틈틈이 대원정 을 우리들이 잘 받아 안아서 더욱 정진하자.”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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